진개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소개 [편집]
2. 생애 [편집]
사기와 한서의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개는 동호(東胡)에 볼모로 가서 신임을 얻었다가, 고국으로 복귀한 뒤 동호를 기습해 영토 1천여 리를 정복한 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개 군을 두었다.[1] 또한, 위략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 2천여 리를 정복하고 영토를 만번한(滿潘汗)까지 넓혔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는 이 사건이 기원전 281년에 일어났다고 본 것으로 생각되는데(지도 사진), 지도 사업이 유사역사학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폐기되는 바람에 비정 근거가 알려질 수 없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진개가 점령했다고 하는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 박천 일대, 압록강 서쪽 등으로 의견으로 나뉘는 등, 그 위치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만번한(滿潘汗)을 '만(滿)과 번한(潘汗)'으로 끊어 읽어야 하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의 지명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에 각각 대응한다는 학설도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진개가 점령했다고 하는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 박천 일대, 압록강 서쪽 등으로 의견으로 나뉘는 등, 그 위치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만번한(滿潘汗)을 '만(滿)과 번한(潘汗)'으로 끊어 읽어야 하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의 지명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에 각각 대응한다는 학설도 있다.
그 뒤에 연나라에는 진개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었다. 호(胡)에 볼모가 되었는데, 호가 그를 매우 믿었다. (연으로) 돌아오고 동호를 격파해, (동호가) 천여 리나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나라의 왕을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조양에서 양평까지 쌓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 호를 막았다. 이 무렵 의관과 속대를 할 줄 아는 곳이 전국(시대)에 일곱이었는데, 그중 셋[2]이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 當是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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