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운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조흥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파일:삼미 조흥운.jpg 어린이 팬들에게 싸인하는 현역 시절 조흥운. | |
이름 | 조흥운(趙興雲) |
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
학력 | |
포지션 | |
투타 | |
프로입단 | |
소속팀 | |
1. 개요 [편집]
2. 선수 생활 [편집]
고교시절엔 인천고에서 4번타자를 맡으며 호성적을 올렸으며 1972년 열린 한일 고교 올스타전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대학교 시절에도 건국대의 클린업 트리오의 일원으로 홈런을 적시적소에 쳐대며 1974년 대학야구가을리그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나 1976년 백호기에서 조종규와 함께 이루어낸 대회 최초의 백투백 홈런 같은 진기록도 뿜어냈다. 실업야구 시절엔 한국화장품 야구단의 창단멤버로 1977년 우승에 힘을 보탰으며, 1978년과 1979년에는 육군 경리단에서 뛰었다. 그 후 1980년에는 한국화장품에 복귀해 1981년까지 뛰었다.
1982년에는 인천 출신이니 삼미슈퍼스타즈 창단멤버로 참가. 여기서 웃긴 점이 있다면 1981년 기사를 보면 조흥운을 모두 삼미의 주력타자로 봤으나 한 신문에선 포수, 다른 신문에선 외야수로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내야수로 뛰었다는 점.
부족한 팀 상황에서 도루 2위 기록인 44개를 기록했으며 타율 또한 팀내 최고인 0.284를 기록했다. 단, 타자의 생산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wRC+[1]에선 104로 121.5인 금광옥에 뒤져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2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경우 더 놀라운데, 전반기가 끝나던 시점에선 타율 0.325로 리그 9위를 찍고 있었으며 도루의 경우 29개의 도루를 기록해 김일권을 누르고 전반기 도루왕을 차지했기 때문[2]. 올스타전에도 베스트 10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감독추천으로 3루수로 출전했다.
하지만 그 후 후반기에 팀내 주력 타자인 양승관, 금광옥이 부상으로 빠지고 전반기에 0.338을 찍던 김경남이 극심한 부진으로 0.269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김호인 또한 부진한 상황 속에 조흥운이 그나마 잘 견뎌내서 0.284인 것. 김은식의 기사에선 4월 25일 대첩 후 감독대행을 맡은 이선덕의 조급증을 이런 부진의 원인으로 뽑았다. 후반기에 도루가 조금만 추가된 것은 출루율 자체가 낮아진 것도 있지만 박현식 감독과 이선덕 감독대행의 성향차이 때문으로 시도 자체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는 기사도 있다.
그래도 별다른 선수도 없던 1982년에도 이 정도 성적이었으니 이선웅, 정구선, 이영구, 김진우 등이 보강된 1983년에는 더 잘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폭망. 타율 0.240를 넘긴 시즌이 한 번도 없었다. 1983년엔 성적이 폭락한 선수로 곧잘 언급되곤 했다. 당시 긍정적인 기사는 장명부와 친한사이라는 거 정도? 1983년 시즌이 끝난 후엔 삼성 라이온즈에서 김한근+함학수<->조흥운+금광옥 트레이드를 제안했으나 무산.
1985년 청보 핀토스로 팀이 바뀔 때는 팀 대표로 인터뷰에 나와 충격이다란 말과 함께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란 말을 남겼는데 1985년 시즌 종료 후 계약양도 선수로 나오며 은퇴하게 된다.
1982년에는 인천 출신이니 삼미슈퍼스타즈 창단멤버로 참가. 여기서 웃긴 점이 있다면 1981년 기사를 보면 조흥운을 모두 삼미의 주력타자로 봤으나 한 신문에선 포수, 다른 신문에선 외야수로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내야수로 뛰었다는 점.
부족한 팀 상황에서 도루 2위 기록인 44개를 기록했으며 타율 또한 팀내 최고인 0.284를 기록했다. 단, 타자의 생산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wRC+[1]에선 104로 121.5인 금광옥에 뒤져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2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경우 더 놀라운데, 전반기가 끝나던 시점에선 타율 0.325로 리그 9위를 찍고 있었으며 도루의 경우 29개의 도루를 기록해 김일권을 누르고 전반기 도루왕을 차지했기 때문[2]. 올스타전에도 베스트 10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감독추천으로 3루수로 출전했다.
하지만 그 후 후반기에 팀내 주력 타자인 양승관, 금광옥이 부상으로 빠지고 전반기에 0.338을 찍던 김경남이 극심한 부진으로 0.269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김호인 또한 부진한 상황 속에 조흥운이 그나마 잘 견뎌내서 0.284인 것. 김은식의 기사에선 4월 25일 대첩 후 감독대행을 맡은 이선덕의 조급증을 이런 부진의 원인으로 뽑았다. 후반기에 도루가 조금만 추가된 것은 출루율 자체가 낮아진 것도 있지만 박현식 감독과 이선덕 감독대행의 성향차이 때문으로 시도 자체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는 기사도 있다.
그래도 별다른 선수도 없던 1982년에도 이 정도 성적이었으니 이선웅, 정구선, 이영구, 김진우 등이 보강된 1983년에는 더 잘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폭망. 타율 0.240를 넘긴 시즌이 한 번도 없었다. 1983년엔 성적이 폭락한 선수로 곧잘 언급되곤 했다. 당시 긍정적인 기사는 장명부와 친한사이라는 거 정도? 1983년 시즌이 끝난 후엔 삼성 라이온즈에서 김한근+함학수<->조흥운+금광옥 트레이드를 제안했으나 무산.
1985년 청보 핀토스로 팀이 바뀔 때는 팀 대표로 인터뷰에 나와 충격이다란 말과 함께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란 말을 남겼는데 1985년 시즌 종료 후 계약양도 선수로 나오며 은퇴하게 된다.
3. 은퇴 이후 [편집]
4. 기타 [편집]
5. 연도별 주요 성적 [편집]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2 | 79 | 299 | .284 | 85 | 16 | 4 | 4 | 35 | 43 | 44 (2위) | 24 | .405 | .338 | |
1983 | 80 | 254 | .236 | 60 | 9 | 4 | 0 | 27 | 24 | 11 | 17 | .303 | .284 | |
1984 | 46 | 126 | .206 | 26 | 6 | 0 | 1 | 6 | 17 | 7 | 10 | .278 | .26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5 | 59 | 90 | .178 | 16 | 2 | 0 | 0 | 3 | 13 | 7 | 10 | .200 | .257 | |
1986 | 18 | 5 | .000 | 0 | 0 | 0 | 0 | 0 | 3 | 0 | 0 | .000 | .000 | |
KBO 통산 (5시즌) | 282 | 774 | .242 | 187 | 33 | 8 | 5 | 71 | 100 | 69 | 61 | .324 | .2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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