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련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분류
이름 | 조오련(趙五連, Jo Oryeon) |
국적 | |
본관 | |
생몰년도 | |
학력 | |
종목 | |
주종목 | 자유형 |
별명 | 아시아의 물개 |
가족 | 부인,장남 조성웅, 차남 조성모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52년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10남매(5남 5녀) 중 열번째로 태어나[3] 1968년 해남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72년 서울 양정고등학교(55회)를 졸업하였다.
1970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손발이 남달리 커서 수영을 하기 좋은 몸이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400m에서 1등을 한 뒤 뒤늦게 기자들이 몰려와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 복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자 조오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처음 경기에 나섰지만 당시 여건상 선진 체육 기술을 배울 여건이 되지 못했고 결국 조오련은 늘 하던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준비운동을 했는데 이를 두고 다른 나라 선수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조오련은 무서운 속도로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이후 경기에서 조오련의 준비운동을 비웃던 선수들이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따라했었다.
이후 1976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이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학사편입을 하여 1981년에 졸업하였다. 1970년에 제6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974년 제7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8년에 제 8회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접영 2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그 해 수영 부문 한국신기록을 50회 째 수립하였으나, 동시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에도 그는 수영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고 1980년 대한해협·1982년 영국 도버해협을 거쳐 2002년에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2005년에는 독도를 횡단했으며, 앞서 2003년에는 한강 700리 종주를 성공하였고 2008년에는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하였다.
한편, 1989년에 조오련 수영교실,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주력하였으며, 1998년 2월부터는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다. 다만 연맹 이사직은 차남 조성모의 대학 문제 때문에 맡았던 거고 조직이나 틀에박힌 형식을 싫어했던지라 이사직 내내 반목했던 탓에 오래가진 못했다.
2001년 아내가 심장마비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4] 이후 2009년 4월 지금의 아내 이성란을 만나 사랑을 싹틔우고 재혼하였다. 도전을 위한 훈련 준비를 하는 등의 모습도 방영된 바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혼 몇 달만인 2009년 8월 4일 오전 11시 32분,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급하게 해남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낮 12시 45분에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1970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손발이 남달리 커서 수영을 하기 좋은 몸이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400m에서 1등을 한 뒤 뒤늦게 기자들이 몰려와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 복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자 조오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처음 경기에 나섰지만 당시 여건상 선진 체육 기술을 배울 여건이 되지 못했고 결국 조오련은 늘 하던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준비운동을 했는데 이를 두고 다른 나라 선수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조오련은 무서운 속도로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이후 경기에서 조오련의 준비운동을 비웃던 선수들이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따라했었다.
이후 1976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이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학사편입을 하여 1981년에 졸업하였다. 1970년에 제6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974년 제7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8년에 제 8회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접영 2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그 해 수영 부문 한국신기록을 50회 째 수립하였으나, 동시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에도 그는 수영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고 1980년 대한해협·1982년 영국 도버해협을 거쳐 2002년에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2005년에는 독도를 횡단했으며, 앞서 2003년에는 한강 700리 종주를 성공하였고 2008년에는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하였다.
한편, 1989년에 조오련 수영교실,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주력하였으며, 1998년 2월부터는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다. 다만 연맹 이사직은 차남 조성모의 대학 문제 때문에 맡았던 거고 조직이나 틀에박힌 형식을 싫어했던지라 이사직 내내 반목했던 탓에 오래가진 못했다.
2001년 아내가 심장마비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4] 이후 2009년 4월 지금의 아내 이성란을 만나 사랑을 싹틔우고 재혼하였다. 도전을 위한 훈련 준비를 하는 등의 모습도 방영된 바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혼 몇 달만인 2009년 8월 4일 오전 11시 32분,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급하게 해남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낮 12시 45분에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3. 미디어 출연 [편집]
- 본인이 직접 나온 것은 아니고 영화 친구 초반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 때 부산 앞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다.
4. 기록 [편집]
- 1978년 수영 부문 한국신기록 50회 수립
- 1980년 대한해협 횡단
- 1982년 영국 도버해협 횡단
- 2002년 대한해협 횡단
- 2003년 한강 700리 종주
- 2005년 독도 횡단
- 2008년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 성공
5. 수상 기록 [편집]
6. 기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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