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모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 |
사망 | |
본관 | |
자 / 호 | 국렬(國烈) / 추산(秋山)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4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정훈모는 1888년 3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창남학교에서 수학한 뒤 1914년 간도로 망명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이상룡 독판의 참모로서 활약했다.
이후 여러 무장투쟁단체에 가담하여 일본기관 파괴에 주력하던 그는 1932년 만주국이 일제의 주도로 수립되자 소련의 힘을 빌려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시베리아 아르하리로 갔다가 헤이룽장성 자무쓰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1939년 4월 7일 자무쓰시 삼남여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정훈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9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지역개발로 찾지 못하고, 대신 그의 위패와 부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42호에 안장했다.
이후 여러 무장투쟁단체에 가담하여 일본기관 파괴에 주력하던 그는 1932년 만주국이 일제의 주도로 수립되자 소련의 힘을 빌려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시베리아 아르하리로 갔다가 헤이룽장성 자무쓰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1939년 4월 7일 자무쓰시 삼남여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정훈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9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지역개발로 찾지 못하고, 대신 그의 위패와 부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42호에 안장했다.
[1] 낙빈공파 30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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