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순(1892)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정학순은 1892년 9월 1일 전라도 영암군 서시면 성지천리(현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성양리 성지천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그는 영암읍에 거주하는 조극환, 군서면 구림리에 거주하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박규상·최기준 등과 함께 읍내와 구림리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4월 10일 이른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읍내 각 집에 배포되었고, 9시경에는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과 시민들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여들었다. 먼저 구림리 유지 박규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날 모여들던 장꾼들도 이에 호응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명에 이르렀다.
정학순은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학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4월 10일 이른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읍내 각 집에 배포되었고, 9시경에는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과 시민들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여들었다. 먼저 구림리 유지 박규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날 모여들던 장꾼들도 이에 호응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명에 이르렀다.
정학순은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학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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