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희(1923)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정태희는 1923년 5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서 아버지 정계원(鄭啓元)과 어머니 이건우(李建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41년경 일본제국 육군으로 징집된 뒤 경비대 통역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41년 4월 중국 산서성 태곡(太谷)[2]에서 한국 광복군 화북지구(華北地區) 지하공작책인 김천성(金天成)과 접선되면서 광복군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일군 경비대의 통역임을 이용, 적지구 노안(路安)에서 적군 이동상황과 한국교포 초모공작 등을 위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중국인의 밀고로 김천성·이서룡과 함께 태원헌병대(太原憲兵隊)에 붙잡혔다.
1944년 12월 12일 중국 산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을(乙) 제3051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소위 항적방조(抗敵幇助)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정태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는 일군 경비대의 통역임을 이용, 적지구 노안(路安)에서 적군 이동상황과 한국교포 초모공작 등을 위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중국인의 밀고로 김천성·이서룡과 함께 태원헌병대(太原憲兵隊)에 붙잡혔다.
1944년 12월 12일 중국 산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을(乙) 제3051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소위 항적방조(抗敵幇助)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정태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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