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해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정광해(鄭光海) |
일본식 성명 | 松永光隆 |
생몰 | |
사망지 | |
위패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정광해는 1927년 7월 11일 경상북도 대구부 대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4월경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했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 아래 관방국·체육국·과학국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10여 부(部)를 두어 조직을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을 뒀다. 이때 정광해는 정완진(鄭晥鎭)과 함께 정단원(正團員)으로 임명되었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광해 등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 앞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 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지방 주재소로 끌려가 친일경찰 김봉생(金鳳生)[1]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대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그 후 만성 폐렴으로 인해 말년을 고통스럽게 보내다 1950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광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 아래 관방국·체육국·과학국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10여 부(部)를 두어 조직을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을 뒀다. 이때 정광해는 정완진(鄭晥鎭)과 함께 정단원(正團員)으로 임명되었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광해 등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 앞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 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지방 주재소로 끌려가 친일경찰 김봉생(金鳳生)[1]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대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그 후 만성 폐렴으로 인해 말년을 고통스럽게 보내다 1950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광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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