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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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정광순은 1880년 7월 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24일 이갑성이 대구로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인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독립운동게획이 구체화되었다. 정광순은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이만집·김태련·김영서·이상백·백남채·권의윤(權義允)·정재순(鄭在淳)·최상원·최경학 등과 함께 만나, 서문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기독교인의 동원을 담당했고,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에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서문외 시장에 나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각지에 몰려오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 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군, 헌병, 경찰의 무차별 사격 및 구타로 강제해산되었고, 정광순은 체포된 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5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광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는 기독교인의 동원을 담당했고,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에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서문외 시장에 나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각지에 몰려오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 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군, 헌병, 경찰의 무차별 사격 및 구타로 강제해산되었고, 정광순은 체포된 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5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광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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