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궁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3. 기타 [편집]
- 태종 시절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린 이숙번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다. 1413년에 풍수가 최양선이 서쪽 대문인 돈의문의 자리가 안좋다고 주장해 돈의문이 폐쇄되었다. 대신 새로 통행할 수 있는 문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숙번의 집 앞이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당연히 자기 집 앞이 시끄러워질 것을 꺼려한 이숙번이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 동네에 문 세우죠."라고 했다. 당시 그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조정은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 때 세운 문이 서전문(西箭門). 여기서 내 집 앞이 조용하자고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와, 저럴 정도로 권력이 굉장히 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숙번이 실각하고 세종이 즉위한 후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 사거리 자리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이 돈의문은 1915년에 헐리고 현재는 도로가 되어있다.
- 1418년 이후 태종이 인덕궁에 들어갈 때는 숭례문을 지나 서전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서전문으로 나와 숭례문을 통해 돌아갔다고 한다. 왕궁과 인덕궁 둘 다 같은 한양도성 안에 있는데 굳이 저랬던 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1418년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일찍 죽었는데 그의 집이 인덕궁 가는 길에 있어 가다가 보게 되면 슬퍼지기 때문이었다.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