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분류
출생 | |
사망 | |
본관 | |
호 | 한솔 |
재임기간 | 제6·7대 국회의장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06년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아버지 이수조(李壽祚)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태(金泰)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30년 동경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0년 동 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주로 지방의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8.15 광복 후 경상북도 학무국장을 지냈으며,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동 대학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북도의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에 의해서 1963년부터 민주공화당 경상북도 지부장이 되어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대구 남구지역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냈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국회의사당 제3별관에서 변칙 통과시킨 흑역사가 있다. 이로 인하여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신진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민주공화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0.26 사건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위원에 위촉되기도 했으나 별 다른 활동은 없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북도의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에 의해서 1963년부터 민주공화당 경상북도 지부장이 되어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대구 남구지역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냈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국회의사당 제3별관에서 변칙 통과시킨 흑역사가 있다. 이로 인하여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신진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민주공화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0.26 사건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위원에 위촉되기도 했으나 별 다른 활동은 없었다.
3. 친일 행적 [편집]
대구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 자기 제자들을 학도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려하기도 하는 등 친일 부역 혐의가 있다.
이효상이 가르쳤던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가 1921년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학교고, 학교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도 나왔다는 것으로 쉴드를 쳐줄려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당시 교남학교는 5년제가 아니라 4년제라서 상급학교 지원이 불가능하여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5년제 학교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이효상이 기껏 찾아가서 모셔왔다는 사람이 친일파 서병조였다.[2]
서병조는[3] 대구 지방의 유지로서 1924년부터 4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참의원 직을 여러 차례 지내고,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조직위원회에서 활동한 인간이다.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각종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35년 조선총독부가 "일한병합 이래 시정방침의 철저한 선전에 노력하여 내선융화를 조장한 인물"이라며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해 칭찬한 인물이다. 이 내용은 재경 대륜학교 동창회 인물/열전에 실린 이야기며, 거기에는 이효상이 "서병조 선생만이 교남을 구출할 분이라고 믿고 서병조 선생에게 교남을 맡아 달라고 끈질게게 설득하고 애절하게 호소"하였다고 나온다(...).
즉 1921년 교남학교 자체가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건 맞지만 정작 5년제 대륜학교로 인가될 수 있었던 건 이효상이 친일파 서병조가 학교를 인수하도록 설득한 덕분이였으며, 대륜고등학교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이효상 개인의 당시 친일성향의 반박 근거가 되기는 희박하다.
이효상이 가르쳤던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가 1921년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학교고, 학교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도 나왔다는 것으로 쉴드를 쳐줄려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당시 교남학교는 5년제가 아니라 4년제라서 상급학교 지원이 불가능하여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5년제 학교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이효상이 기껏 찾아가서 모셔왔다는 사람이 친일파 서병조였다.[2]
서병조는[3] 대구 지방의 유지로서 1924년부터 4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참의원 직을 여러 차례 지내고,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조직위원회에서 활동한 인간이다.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각종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35년 조선총독부가 "일한병합 이래 시정방침의 철저한 선전에 노력하여 내선융화를 조장한 인물"이라며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해 칭찬한 인물이다. 이 내용은 재경 대륜학교 동창회 인물/열전에 실린 이야기며, 거기에는 이효상이 "서병조 선생만이 교남을 구출할 분이라고 믿고 서병조 선생에게 교남을 맡아 달라고 끈질게게 설득하고 애절하게 호소"하였다고 나온다(...).
즉 1921년 교남학교 자체가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건 맞지만 정작 5년제 대륜학교로 인가될 수 있었던 건 이효상이 친일파 서병조가 학교를 인수하도록 설득한 덕분이였으며, 대륜고등학교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이효상 개인의 당시 친일성향의 반박 근거가 되기는 희박하다.
4. 여담 [편집]
5. 관련 문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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