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690년 한성부 서부 황화방 군기사계 소정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2]에서 예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이진휴(李震休)와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胄)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갖고 있던 1713년(숙종 39), 증광시 문과에 병과 24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승문원정자, 김천도찰방, 승정원주서,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의 당여[3]라는 이유로 구금되어 여러 번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두루 답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동기였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과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택리지이다.지리계의 고든 램지였다.
택리지에서 사농공상의 구분을 단순한 직업적 차이로만 보았다. 그리고 지리적 환경을 잘 이용할 것, 상업적 농업 등을 중시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의 당여[3]라는 이유로 구금되어 여러 번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두루 답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동기였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과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택리지이다.
택리지에서 사농공상의 구분을 단순한 직업적 차이로만 보았다. 그리고 지리적 환경을 잘 이용할 것, 상업적 농업 등을 중시하였다.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