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1872)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5대 이언용 | ← | 6대 이완용 | → | 7대 이택주 | ||
은언궁 5대 사손 이완용 李完鎔 | ||
전주(全州) | ||
완용(完鎔) | ||
양부 | ||
양모 | 정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 |
생부 | 이재경[1] | |
생모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
부인 | 문화 류씨(文化 柳氏) | |
자녀 | 슬하 2남 | |
생몰 기간 | 출생 | |
사망 | ||
1. 개요 [편집]
대한제국의 황족 출신 관료이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양현손자, 상계군의 양증손자, 익평군의 양손자, 덕안군의 양자이다. 은언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과 동명이인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흔히 아는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둘 다 친일파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완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2]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과 동명이인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흔히 아는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완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2]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생애 [편집]
2.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편집]
1872년(고종 9년) 12월 13일에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의 12대손으로 부사과를 지낸 이재경이고, 친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22살이던 1893년(고종 30년)에 은언군의 사손 덕안군의 아들인 이언용이 요절하여 고종의 명으로 덕안군의 양자가 되었다.[3] 이완용은 이언용과 같은 항렬이기에 이언용을 대체한 양자로 온 것이다. 보통 저럴 땐 이언용의 양자를 구하는데, 이완용의 입양은 특이한 경우이다.
음서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홍릉, 예릉의 참봉을 지내고 능령을 거쳐 비서원승, 봉상사부제조,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군수로도 여러 번 임명받아 삭녕, 통진, 중화, 수원군수를 역임했다. 비인군과 익산군 군수로도 임명받았지만 저 땐 부임하기 전에 새 벼슬을 받아 실제로 역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내부 회계국장[4] 겸 시종원 시종, 강화부윤, 종정원경, 동지돈녕원사[A], 태복사장[A], 봉상사제조[7]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품계 또한 높아서 최종적으로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22살이던 1893년(고종 30년)에 은언군의 사손 덕안군의 아들인 이언용이 요절하여 고종의 명으로 덕안군의 양자가 되었다.[3] 이완용은 이언용과 같은 항렬이기에 이언용을 대체한 양자로 온 것이다. 보통 저럴 땐 이언용의 양자를 구하는데, 이완용의 입양은 특이한 경우이다.
음서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홍릉, 예릉의 참봉을 지내고 능령을 거쳐 비서원승, 봉상사부제조,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군수로도 여러 번 임명받아 삭녕, 통진, 중화, 수원군수를 역임했다. 비인군과 익산군 군수로도 임명받았지만 저 땐 부임하기 전에 새 벼슬을 받아 실제로 역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내부 회계국장[4] 겸 시종원 시종, 강화부윤, 종정원경, 동지돈녕원사[A], 태복사장[A], 봉상사제조[7]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품계 또한 높아서 최종적으로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2.2. 일제강점기 [편집]
3. 사후 [편집]
4. 여담 [편집]
5. 가족과 후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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