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1910)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이석(李錫)
이명
이이석(李李錫)
본관
생몰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4]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이석은 1910년 12월 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거주하였다.[5]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그는 결사대에 가담,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후 1929년 11월에는 경성부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한다'는 격문을 제작·배포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월 29일부터 수감되었으며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귀향하여 고향 칠곡군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에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조선 독립 및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편으로 왜관면에서 이두석·박형동·윤억병(尹億炳) 등과 함께 독서회라는 이름으로 비밀결사 성진회(惺進會)를 만들고, 회원 70여 명과 더불어 농촌계몽과 민족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던 중 1938년 2월경 체포되었으며, 4년간 취조를 받고[6] 1941년 3월 7일이 되어서야 대구지검의 예심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1여년 후인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통산 840일)을 언도받아#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8년 12월 5일 별세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1930년 12월 17일 촬영된 사진.[2]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 22대손 석(錫) 진(鎭) 항렬.[3]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2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두석·이수각·이수목도 이 마을 출신이다.[5]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지금의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었으며, 1976년 2월 20일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6] 1940년에는 6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구류갱신결정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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