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곤(1919)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사동궁 1대 사손 이곤 李錕 | ||
국적 | ||
출생 | ||
사망 | ||
사동궁주 재임 (비공식) | ||
황실 이름 | 곤(錕) | |
아명 및 호적명 | 이명길(李明吉) | |
부모 | ||
형제 | ||
배우자 | 황경생(黃慶生) | |
자녀 | 장남 이수 (1958년생), 차남 이준 (李浚, 1961년생) | |
최종 당적 | ||
경력 |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19년에 태어났다. 일본 릿쇼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2년 만에 중퇴했다.#
8.15 광복 이후 궁핍한 삶을 살았다. 왕실보조비가 나오긴 했지만 명목상의 액수여서 살림에 큰 보탬은 되지 못했다. 6.25 전쟁 때는 미군 부대 통역관, 거제도포로수용소 미군노무처식당의 카운터 등 많은 일을 했다.#
휴전 후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구황실 재산관리국의 허가를 받고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제2공화국 시기인 1960년에 장면 총리의 천거로 국회도서관 사서로 2년 간 일했으며, 이후 민주공화당 황호현 의원의 추천으로 1964년부터 1974년까지 국회사무처 기능직 직원으로 근무했다.
1962년에 덕수궁 궁담을 없애고 철책을 새로 만들 때 나와서 청량리 구 홍릉 한 구석에 낡은 마굿간을 개조하여 7년 간 임대료 2250원을 내고 살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에서 미관상의 이유로 1967년부터 7차례나 철거통지를 보냈고, 결국 1969년 4월에 철거하여 이곤의 가족들은 쫓겨났다. 당장 갈 곳이 없어 홍릉 한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밤을 지새려했으나 하필 비가 쏟아져 근처의 누각 처마 밑으로 옮겨야 했다.#
8.15 광복 이후 궁핍한 삶을 살았다. 왕실보조비가 나오긴 했지만 명목상의 액수여서 살림에 큰 보탬은 되지 못했다. 6.25 전쟁 때는 미군 부대 통역관, 거제도포로수용소 미군노무처식당의 카운터 등 많은 일을 했다.#
휴전 후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구황실 재산관리국의 허가를 받고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제2공화국 시기인 1960년에 장면 총리의 천거로 국회도서관 사서로 2년 간 일했으며, 이후 민주공화당 황호현 의원의 추천으로 1964년부터 1974년까지 국회사무처 기능직 직원으로 근무했다.
1962년에 덕수궁 궁담을 없애고 철책을 새로 만들 때 나와서 청량리 구 홍릉 한 구석에 낡은 마굿간을 개조하여 7년 간 임대료 2250원을 내고 살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에서 미관상의 이유로 1967년부터 7차례나 철거통지를 보냈고, 결국 1969년 4월에 철거하여 이곤의 가족들은 쫓겨났다. 당장 갈 곳이 없어 홍릉 한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밤을 지새려했으나 하필 비가 쏟아져 근처의 누각 처마 밑으로 옮겨야 했다.#
3. 사망과 이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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