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1341)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李皐
1341(충혜왕 복위 2)∼1420(세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망천(忘川).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집의에 오르고, 한림학사·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뒤에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즐기는 바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자신이 사는 산천을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태조가 화공에게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석비를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팔달산 아래에 거주하였으나 정조 때 그 자리에 화성행궁을 지으면서 터를 인근 광교산 아래로 옮겼다.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8월 7일 경신 첫번째 기사
다들 1392년 조선 건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알고 있으며, 민족문화대백과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나 후손이 조선왕조실록으로 찾아본 결과, 그가 태종 때까지 관직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아마 후대에 윤색이 된 듯하다.
1341(충혜왕 복위 2)∼1420(세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망천(忘川).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집의에 오르고, 한림학사·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뒤에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즐기는 바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자신이 사는 산천을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태조가 화공에게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석비를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팔달산 아래에 거주하였으나 정조 때 그 자리에 화성행궁을 지으면서 터를 인근 광교산 아래로 옮겼다.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8월 7일 경신 첫번째 기사
다들 1392년 조선 건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알고 있으며, 민족문화대백과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나 후손이 조선왕조실록으로 찾아본 결과, 그가 태종 때까지 관직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아마 후대에 윤색이 된 듯하다.
그는 조견(趙狷)·이집(李集)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내왕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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