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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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유중무는 1875년 8월 21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한동규(韓東奎)·이순구·조인원·유관순 등이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벌인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유중무는 이날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 헌병주재소에서는 이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두르고 발포를 가했다. 이로 인해 유중무의 형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자가 발생했다.
형의 사망에 격분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유중권의 시체를 둘러메고 주재소로 달려가,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유중무는 이날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 헌병주재소에서는 이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두르고 발포를 가했다. 이로 인해 유중무의 형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자가 발생했다.
형의 사망에 격분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유중권의 시체를 둘러메고 주재소로 달려가,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너희는 몇십년이나 보조원 노릇을 하겠느냐"
파일:유중무2.png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6년 4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중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가족관계 [편집]
- 유중권(1863~1919): 유중무의 형.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본군이 발포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절명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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