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여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미상 | |
사망 | |
이명 | 유종여(柳宗汝), 유종여(柳鍾汝), 유창호(柳昌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유종여는 일찍이 정읍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1907년 11월 의병을 일으킨 뒤 이듬해 음력 2월 말부터 전북 순창 및 전남 장성 일대에서 부하 60명과 함께 활동했다. 1908년 11월 10일부터 1909년 음력 2월 10일까지 순창·담양·광주 일대에서 장순흥(張順興) 등과 함께 총기 20정을 모집하였고, 칼을 휴대한 의병 30여 명을 지휘하여 식료품·짚신 등을 모집하였다.
1908년 8월 18일 장성군(面名 미상) 용후리(龍後里)를 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편의를 제공한 김참봉을 잡아 지붕 위에 올려놓고 집에 불을 질렀으며, 1909년 11월 20일경 담양군 용면(龍面) 추월산(秋月山)에서 광주수비대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또 11월 말일 경에는 총기 20정을 휴대한 부하 80명을 지휘하여 담양군 산면(山面) 월산리(月山里) 이모(李某) 집에 침입하여 ‘우리는 의병인 바 제복(製服) 및 조발비(調髮費) 3백 냥을 출급하라’고 하여 엽전 3백 냥을 군수금으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1909년 5월 8일 순창군 쌍치면(雙置面) 학선리 오룡촌(五龍村)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정읍 구룡동에 매장되었다가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유종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08년 8월 18일 장성군(面名 미상) 용후리(龍後里)를 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편의를 제공한 김참봉을 잡아 지붕 위에 올려놓고 집에 불을 질렀으며, 1909년 11월 20일경 담양군 용면(龍面) 추월산(秋月山)에서 광주수비대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또 11월 말일 경에는 총기 20정을 휴대한 부하 80명을 지휘하여 담양군 산면(山面) 월산리(月山里) 이모(李某) 집에 침입하여 ‘우리는 의병인 바 제복(製服) 및 조발비(調髮費) 3백 냥을 출급하라’고 하여 엽전 3백 냥을 군수금으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1909년 5월 8일 순창군 쌍치면(雙置面) 학선리 오룡촌(五龍村)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정읍 구룡동에 매장되었다가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유종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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