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적(조선)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3. 후사 [편집]
왕적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많은 왕씨들이 왕적의 뒤를 이어 봉사하려고 했다. 봉사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왕씨 모두가 천얼이었는데, 숭의전감은 문관직을 겸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천첩 소생인 얼자를 뽑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충렬왕의 13대손이라는 유생 왕인위(王仁偉)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세파(世派)의 근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봉사자로 정하기에는 애매했다.
예조판서 정옥형은 제사를 주관할 왕씨의 적파를 따로 정해 뽑을 것을 중종에게 아뢨고, 이듬해까지 봉사자 후보는 다섯명으로 좁혀졌다. 중종은 최종 후보를 가리기 위해 ① 서울 거주자, ② 아들 있음을 부가 조건으로 세웠다. 근거는 시골에 살면서 경기도 마전군으로 왕래하게 되면 제사에만 힘쓰기가 힘들고, 아들이 없으면 왕적의 경우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조판서 정옥형은 제사를 주관할 왕씨의 적파를 따로 정해 뽑을 것을 중종에게 아뢨고, 이듬해까지 봉사자 후보는 다섯명으로 좁혀졌다. 중종은 최종 후보를 가리기 위해 ① 서울 거주자, ② 아들 있음을 부가 조건으로 세웠다. 근거는 시골에 살면서 경기도 마전군으로 왕래하게 되면 제사에만 힘쓰기가 힘들고, 아들이 없으면 왕적의 경우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 갑사(甲士) 왕순(王順)
- 교생(校生) 왕징(王澄)
- 유학(幼學) 왕긍중(王兢中)
서울에 거주하는 유생. 아들이 있고 친족중에는 관직에 나아간 사람이 있다. 이 인물 또한 충렬왕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대수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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