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지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여진정벌 참전자 왕자지 | |
시호 | 장순공(章順公) |
본관 | 해주 왕씨(海州 王氏) |
이름 | 소중(紹中) → 자지(字之) |
자 | 원장(元長) |
아들 | 왕의(王毅) |
생몰연도 | 1066년 ~ 1122년 |
1. 생애 [편집]
고려의 개국공신 왕유(王儒)[1]의 후손이다. 왕자지의 아버지는 해주 서리[2] 출신이였다. 누나가 계림공의 수하인 상장군 왕국모와 결혼했는데, 왕국모는 이자의의 난 당시 처남 왕자지로 하여금 본궐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고 이 공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 ||
대원수(大元帥) | ||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 ||
부원수(副元帥) | ||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 ||
판관(判官) | ||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
기타 지휘관 | ||
녹사(錄事) 척준경 |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
병과 | ||
신기군(神騎軍) | 신보군(神步軍) | 발화군(發火軍) |
도탕군(跳盪軍) | 경궁군(梗弓軍) | 정노군(精弩軍) |
항마군(降魔軍) | ||
도합 170,000 명 | ||
내시[3] 출신으로 윤관의 북방 개척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예종 3년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고, 윤관의 휘하에서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함주와 영주 지방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 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 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2. 여담 [편집]
-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소드마스터인 척준경의 생애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이유로 그의 절친인 왕자지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많다.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시대를 다룰 때도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 패널들은 왕 장군이라고 애둘러 언급하고 이름은 자막으로만 나왔다.[4] 왕자지의 초명은 소중(紹中), 자는 원장(元長)이니 드라마할 때 왕소중 또는 왕원장으로 나오면 문제가 없긴 하다.[5]
왕원장의 왕자X는 왕소중하니까요어?사실 사극이라고 모든 기록상의 인물을 다 등장시키는건 아닌지라 굳이 등장시키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기만 해도 된다.
- 우스개로 왕자지가 사극에 출연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나올 거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
- 중등과정 국사 교육 과정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난감한 어감으로 인해 잘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로는 고려시대에 널리 퍼진 '이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었던 '십팔자위왕'이 있다.
- 본인의 묘지명은 실전됐으나, 본인의 아내인 황려군부인(黃驪郡夫人) 김씨의 묘지명이 현전한다. 묘지명엔 황려군부인이 음력 1130년 7월 10일에 만 68세의 나이로 졸(卒)[6]했다고 한다.
-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3. 같이보기 [편집]
[1] 원래 해주 박씨였고 궁예의 신하였는데 역성혁명 당시 왕건을 도운 공로로 왕씨 성을 하사받아 해주 왕씨가 되었다. 즉 일반 귀족보다도 신분이 높은 준 왕족급이다.[2] 지방의 약세 호족. 조선시대엔 기세가 크게 꺾인다.[3] 고려시대 내시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신진 관료들을 말한다. 내시하면 환관을 떠올리는데,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환관이 아니며 김인존, 안향 같은 상당한 엘리트만이 될 수 있었다.[4] 메인 패널이었던 임용한은 2000년대 초반에 저서를 통해 왕자지의 존재를 국내 역덕계에 알린 일등 공신이다. 임용한교수의 말에 따르면 원래 본명을 언급하며 방송하기로 했지만, 방송하다보니 웃음이 터져나와 결국 언급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고 한다.[5] 이정도 높은 신분의 인물이라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보통은 관직명으로 부르고,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이름(名)보단 자(字)로 부른다. 부모나 임금이라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부모는 아명으로, 임금도 그를 존중해 관명으로 부르면 해결된다. 다만 조서 같은 공문서에는 이름이 들어가야 하므로 이것까진 피할 수 없다(...)[6] 유교 예법 상으론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사대부는 졸(卒), 평민은 사(死)로 죽음을 표현한다.[7] 작가는 과거 노숙검객후크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박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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