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군해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신라는 앞서 642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회담은 결렬되고 김춘추가 갇혔다가 거짓말로 겨우 탈출해나오는 일을 겪어 고구려와는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상태였다. 648년에는 고구려의 적대국인 당나라에 김춘추가 사신으로 보내졌는데 성공적으로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서해 바다 위에서 고구려 해군을 만났다.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잡아 죽이려 했지만 그를 보좌하던 온군해가 말리는 김춘추에게 간청하며 김춘추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김춘추를 대신하여 죽었다. 이덕분에 김춘추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같은 온씨라는 점에서 가까운 시대 고구려측 인물인 온달이나 온사문과 한 집안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 그래서 온군해를 고구려 계통 가문으로 설정하는 미디어도 간혹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애시당초 지배층을 제외하면 성씨가 일반적이던 시절도 아니다.
골품제에 의해 진골 이상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인 대아찬에 추증된 것을 보아 김춘추를 다룬 각종 창작물에서 김춘추의 일개 종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엄연히 신라에서 뿌리를 내린 진골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김춘추는 신라 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았고 능력 위주의 인사와 논공행상을 벌이기도 했기 때문에[1], 그리고 죽죽처럼 골품이 낮은 지방민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사후에 6두품 관등으로 추증되는 것을 볼 때 일단 죽음으로 공을 세운 뒤 추증받을 때는 골품이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 보이는 정황이 기록에서 종종 나오기 때문에 온군해 역시 생전에는 진골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같은 온씨라는 점에서 가까운 시대 고구려측 인물인 온달이나 온사문과 한 집안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 그래서 온군해를 고구려 계통 가문으로 설정하는 미디어도 간혹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애시당초 지배층을 제외하면 성씨가 일반적이던 시절도 아니다.
골품제에 의해 진골 이상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인 대아찬에 추증된 것을 보아 김춘추를 다룬 각종 창작물에서 김춘추의 일개 종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엄연히 신라에서 뿌리를 내린 진골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김춘추는 신라 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았고 능력 위주의 인사와 논공행상을 벌이기도 했기 때문에[1], 그리고 죽죽처럼 골품이 낮은 지방민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사후에 6두품 관등으로 추증되는 것을 볼 때 일단 죽음으로 공을 세운 뒤 추증받을 때는 골품이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 보이는 정황이 기록에서 종종 나오기 때문에 온군해 역시 생전에는 진골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3. 대중매체에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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