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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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성악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편집]

옥인찬은 1917년 3월 4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옥성빈(玉成彬)[1]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상하이에서 여운형·선우혁·한진교·김철 등이 세운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와 중국계 현지 학생들이 다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우라(鎭壇)대학 법과에 진학하였으며, 오우라대학 졸업 후 중국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이후 상하이의 푸단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성악가가 되었고 한국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대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이때 '순국선열 추도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였고 1948년 2월 국내 최초로 부민관에서 초연된 오페라 춘희에서 제르몽 역을 맡았으며, 미군부대와 관계되는 토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과로로 인한 황달을 치료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가 수 개월 간 요양하였다.

같은 해 귀국한 그는 오페라 카르멘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세 번째 작품을 준비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을 맞았다. 당시 그는 서북청년단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갖은 고초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피난했다. 피난지 부산에서 그는 미8군의 심리작전국에 중공군 포로를 상대하는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2년여간 근무하였는데, 이때 프랑스인 친구를 통해 리옹대학 유학생으로 추천을 받고 1952년 국내 1호 프랑스 유학생으로 리옹대학에 유학하면서 1년간 국제법을 수학하였다.

1953년 귀국길에 잠시 일본 도쿄를 들러 미국인 지인을 만난 그는 지인을 통해 국제검사시험공사(INTECO) 부산지점 책임자 자리를 알선받았고, 이에 응하여 곧 근무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진해반공회의에 베트남을 응대하는 프랑스어 통역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뒤 1957년 국제검사시험공사 방콕지점 매니저로 전근되면서 태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국제농산물검사원 자격을 얻은 그는 2년 뒤인 1959년경 국제검사시험공사 지점장을 사직하고, 태국인 지인과 함께 '타이 프라스티'라는 이름의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또 1961년에는 방콕에 '아리랑식당'을 개업하기도 했다. 이때 태국 제9대 국왕인 라마 9세의 탄신연회에 한국음식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절판 요리를 국왕 앞에서 만들어주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식당 경영에 문제가 생겨 '아리랑식당'을 폐업하고, 이어 개인 농산물검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태국인과 동업하던 '타이 프라스티' 회사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대신 방콕 시내에 '서울 레스토랑'을 개업하여 경영하는 한편#, 매년 자선독창회를 열어 태국에 한국 음악을 알리는 민간사절로 활약하기도 했다.#

1994년 9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옥인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1] 옥관빈 피살사건의 피해자 옥관빈의 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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