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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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오학성은 1880년 10월 1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 표충사(表忠寺)에서 불법을 공부했다. 그러던 1919년 4월 4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밀양군 단장면 대용동 시장에서 5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는 것과 함께 네칸 길이의 간두(竿頭)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울리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5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만세시위를 개시하고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헌병주재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를 탄압하는 일본헌병에 대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일본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기세를 올렸으며, 밀양 등지에서 출동한 일본군 응원부대와도 접전을 벌이면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된 증원 출동으로 말미암아 몇차례 공방을 벌이던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체포된 그는 1919년 1월 20일 대구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2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1925년 6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오학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에 5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만세시위를 개시하고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헌병주재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를 탄압하는 일본헌병에 대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일본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기세를 올렸으며, 밀양 등지에서 출동한 일본군 응원부대와도 접전을 벌이면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된 증원 출동으로 말미암아 몇차례 공방을 벌이던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체포된 그는 1919년 1월 20일 대구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2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1925년 6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오학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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