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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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환의 수상 경력 / 역대 직책 / 역대 등번호 |
이름 | 양일환 (梁日煥 / Il-Whan Yang) |
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
출신학교 |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입단 | 1983년 1차지명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83~1989) |
지도자 | |
병역 | |
1. 개요 [편집]
2. 선수 시절 [편집]
2.1. 연도별 성적 [편집]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3 | 32 | 176⅓ | 9 | 7 | 1 | 0.563 | 3.22 | 155 | 12 | 74 | 63 | 82 | 63 |
| |
1984 | 20 | 64 | 2 | 5 | 1 | 0.286 | 4.64 | 57 | 7 | 37 | 20 | 34 | 33 |
| |
1985 | 19 | 61⅔ | 3 | 5 | 1 | 0.375 | 5.11 | 62 | 10 | 31 | 17 | 37 | 35 |
| |
1986 | 22 | 96⅔ | 6 | 3 | 1 | 0.667 | 3.72 | 62 | 5 | 53 | 33 | 44 | 40 |
| |
1987 | 18 | 86 | 8 | 4 | 1 | 0.667 |
| 62 | 4 | 40 | 35 | 23 | 18 |
| |
1988 | 10 | 29⅓ | 1 | 2 | 0 | 0.333 | 8.90 | 36 | 4 | 23 | 10 | 30 | 29 |
| |
1989 | 18 | 52⅔ | 2 | 6 | 0 | 0.250 | 6.79 | 77 | 6 | 25 | 13 | 48 | 39 |
| |
KBO 통산 (7시즌) | 139 | 565⅔ | 31 | 32 | 5 | 0.492 | 4.09 | 529 | 48 | 283 | 191 | 298 | 257 | 1.36 | |
3. 지도자 시절 [편집]
3.1. 삼성 라이온즈 시절 [편집]
은퇴 후 바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1,2군의 투수코치로서 1998년까지 활동했다. 1998 시즌을 마치고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한 후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일본 연수와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하며 삼성을 잠시 떠났었지만, 2001년 삼성에 복귀해 팀의 3회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2008년 5월에 갑자기 조계현 당시 2군 투수코치와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5] 그리고 그 해 말에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여기저기 노린 팀도 많았을 법했는데 대구 지역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그는 반드시 현장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안 되면 다시 연수를 떠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9 시즌이 끝나고 다시 삼성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2011 시즌에는 암으로 입원하여 끝내 생을 마감한 장효조 2군 감독을 대신하여 2군 감독 대행을 겸임했다.
선수로서는 김시진, 김일융 등에 밀려 명성을 날리지 못했지만 김시진이 못다한 투수코치로서의 역할을 책임졌으며, 공백기를 빼면 한 팀에서 코치로서의 오랜 시간 동안 봉직 중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삼성 마운드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팬들의 평가는 꽤 좋았던 편. 1차 지명 폐지와 고순위로 인한 낮은 지명 순서 등으로 포텐셜 자체가 그리 높지 않다고 평가되는 삼성 2군 투수진에서도 괜찮은 투수들을 적잖게 키워냈다는 평가와 함께 일환매직으로도 통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2군에서 올라오는 투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2군에서 묵힌 유망주나 부상을 당한 선수가 2군만 갔다하면 평균 구속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좀처럼 구속 회복이 되지 않는 등의 이유[6]로, 일각에서는 삼성 투수진이 망한 원인을 김태한이 아닌 양일환에게서 찾을 정도로[7] 과거에 비해 평가가 많이 떨어졌다.
2016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부진과 함께 2군 육성문제가 부각되며 평가가 급하락했다. 특히 최고 구속이 150km 가까이 나오던 최충연이 투구폼을 교정한 뒤 최고구속이 140도 안 나오며 비난받았다. 결국 시즌 후 감독 교체의 여파로 팀을 떠나게 됐다.
하지만 2008년 5월에 갑자기 조계현 당시 2군 투수코치와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5] 그리고 그 해 말에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여기저기 노린 팀도 많았을 법했는데 대구 지역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그는 반드시 현장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안 되면 다시 연수를 떠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9 시즌이 끝나고 다시 삼성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2011 시즌에는 암으로 입원하여 끝내 생을 마감한 장효조 2군 감독을 대신하여 2군 감독 대행을 겸임했다.
선수로서는 김시진, 김일융 등에 밀려 명성을 날리지 못했지만 김시진이 못다한 투수코치로서의 역할을 책임졌으며, 공백기를 빼면 한 팀에서 코치로서의 오랜 시간 동안 봉직 중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삼성 마운드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팬들의 평가는 꽤 좋았던 편. 1차 지명 폐지와 고순위로 인한 낮은 지명 순서 등으로 포텐셜 자체가 그리 높지 않다고 평가되는 삼성 2군 투수진에서도 괜찮은 투수들을 적잖게 키워냈다는 평가와 함께 일환매직으로도 통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2군에서 올라오는 투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2군에서 묵힌 유망주나 부상을 당한 선수가 2군만 갔다하면 평균 구속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좀처럼 구속 회복이 되지 않는 등의 이유[6]로, 일각에서는 삼성 투수진이 망한 원인을 김태한이 아닌 양일환에게서 찾을 정도로[7] 과거에 비해 평가가 많이 떨어졌다.
2016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부진과 함께 2군 육성문제가 부각되며 평가가 급하락했다. 특히 최고 구속이 150km 가까이 나오던 최충연이 투구폼을 교정한 뒤 최고구속이 140도 안 나오며 비난받았다. 결국 시즌 후 감독 교체의 여파로 팀을 떠나게 됐다.
3.2. KIA 타이거즈 시절 [편집]
4. 여담 [편집]
[1] 5월 17일부로 보직변경[2]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3] 삼성코치로 재임한 기간만 해도 무려 25년이다.[4] 한 자리 수의 등번호 경우 1번을 제외한 번호를 투수가 단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OB 베어스의 박상열도 있다. 이후 2016년 양일환이 코치로 소속된 삼성 라이온즈의 새 외국인 투수 앨런 웹스터가, 2017년도엔 FA 이적한 우규민이 2번을, 양일환이 나갔지만 2020년에는 신인급 선수 아니면 별로 선호하지 않는 번호인 4번을 외국인 투수 데이비드 뷰캐넌 다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5] 이를 두고 선동열 감독의 친정체제 구축이라는 게 대다수의 반응이었다.[6] 대표적인 사례로는 허리 부상에서 복귀한 구속이 5km/h 이상 줄어든 김현우가 있다.[7] 특히나 2군은 육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코칭스태프 중에서 투수진의 성장이 더딘 원인을 찾는다면 2군 투수코치인 양일환의 책임이 더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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