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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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출생 | |
사망 | |
정당 | |
학력 | |
종교 | |
임기 | 불명 |
배우자 | 리보자오(李伯钊, 1911년 ~ 1985년 4월 17일) |
자녀 | 양사오쥔(杨绍军, 아들) 양사오밍(杨绍明, 아들) 양리(杨李, 딸) |
가족 | 불명 |
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주석 | |
임기 | 1988년 4월 8일 ~ 1993년 3월 27일 |
부주석 | |
총리 | |
중국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원회사무총장 | |
임기 | 1945년 8월 ~ 1956년 11월 |
의장 | |
중국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원회사무총장 | |
임기 | 1981년 7월 ~ 1989년 11월 |
의장 | |
중국 공산당의 중앙판공청 | |
임기 | 1989년 11월 9일 ~ 2004년 9월 19일 |
1. 개요 [편집]
중국의 제4대 주석.
2. 생애 [편집]
쓰촨성 충칭시 출신으로 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모스크바의 손중산 대학에서 유학한 28인의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농촌혁명과 유격전을 주장하던 마오쩌둥과 대립하였다. 소련유학파들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에 마오쩌둥과 주더를 대신해 홍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기존의 유격전을 버리고 중국 국민당군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나 화력에서 밀리면서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1935년 대장정 중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함으로써 마오쩌둥 지도체제 확립에 기여를 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주임을 지냈는데 1956년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로 취임하면서 이 때부터 덩샤오핑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1965년 기밀누설죄를 뒤집어쓰고 중앙서기처 주임에서 해임되었고, 해서파관 사건 때 베이징 시장 펑전, 참모총장 뤄루이칭 등과 함께 5.16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반혁명집단으로 몰렸으며, 마오쩌둥으로부터 위연이라는 비판을 받고 권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 당 관료에 재임명되었다. 1988년 리셴녠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제4대 주석에 올랐으나 실권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덩샤오핑에게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한데다가 동향인이었기 때문에 덩샤오핑과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일부 역덕[1]들이 양상쿤이 보수파로서 군내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을 견제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양상쿤은 중공정권 수립후 군에서 물러나 당료역만 했고, 군에서도 정치장교 노릇만 했지 지휘관으로 큰 군공을 세운 바도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운 덩샤오핑과는 달리 군내 인맥은 그다지 두텁지 않았다. 또한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동향인으로 매우 친했고, 1966년 실각해서 12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양상쿤을 다시 불러서 복권시켜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었기 때문에(그리고 바지사장이지만 국가주석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의 힘이었다.) 양상쿤이 자신의 친구이자 은인을 견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실제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할 당시에도 가장 먼저 연락한 원로가 양상쿤이었고 양상쿤 또한 이에 호응하여 덩샤오핑이 있던 선전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에 힘을 실어준게 양상쿤이었다. 그리고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반체제인사가 된 장옌융은 양상쿤이 자신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커다란 실수다. 나중에 평가될 것"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보면 양상쿤이 보수파의 거두로서 덩샤오핑을 견제했다고 보기 힘들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주임을 지냈는데 1956년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로 취임하면서 이 때부터 덩샤오핑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1965년 기밀누설죄를 뒤집어쓰고 중앙서기처 주임에서 해임되었고, 해서파관 사건 때 베이징 시장 펑전, 참모총장 뤄루이칭 등과 함께 5.16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반혁명집단으로 몰렸으며, 마오쩌둥으로부터 위연이라는 비판을 받고 권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 당 관료에 재임명되었다. 1988년 리셴녠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제4대 주석에 올랐으나 실권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덩샤오핑에게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한데다가 동향인이었기 때문에 덩샤오핑과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일부 역덕[1]들이 양상쿤이 보수파로서 군내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을 견제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양상쿤은 중공정권 수립후 군에서 물러나 당료역만 했고, 군에서도 정치장교 노릇만 했지 지휘관으로 큰 군공을 세운 바도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운 덩샤오핑과는 달리 군내 인맥은 그다지 두텁지 않았다. 또한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동향인으로 매우 친했고, 1966년 실각해서 12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양상쿤을 다시 불러서 복권시켜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었기 때문에(그리고 바지사장이지만 국가주석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의 힘이었다.) 양상쿤이 자신의 친구이자 은인을 견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실제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할 당시에도 가장 먼저 연락한 원로가 양상쿤이었고 양상쿤 또한 이에 호응하여 덩샤오핑이 있던 선전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에 힘을 실어준게 양상쿤이었다. 그리고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반체제인사가 된 장옌융은 양상쿤이 자신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커다란 실수다. 나중에 평가될 것"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보면 양상쿤이 보수파의 거두로서 덩샤오핑을 견제했다고 보기 힘들다.
3. 기타 [편집]
[1] 냉전시대의 대만발 소문들이 근거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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