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혁성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
사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심혁성은 1888년 8월 15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계양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3월 24일 오후 2시경 계양면 장기리 장터에서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일본 순사 4명이 심혁성을 현행범으로 체포한 뒤 계양면사무소로 끌고갔다. 면사무소에서는 심 지사를 놓아주라고 했으나, 순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 경찰 주재소로 데려갔다. 이에 군중 100여 명이 를 따라가며 만세시위를 하면서 심 지사를 놓아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경찰과 안면 있는 임성춘(林聖春)은 일본 경찰들과 석방을 교섭하는 한편 뒤로는 여러 사람을 시켜 심혁성을 빼내오게 했다. 군중은 “어서 그 사람을 놓아 달라”고 소리 지르며 경찰의 앞길을 막았다.

이에 경찰이 취조하고 바로 석방하겠다며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안 될 말이다”라는 외침이 들려왔고, 이에 군중이 주재소로 난입하여 심혁성을 빼냈다. 일본 경찰은 칼을 빼 들고 군중 속으로 달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이은선(李殷先)이 일본 경찰의 칼에 찔려 숨졌다. 이에 군중은 분노하여 순사를 죽여라” 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했다. 이때 지원 경찰 3명이 나타나 심 지사를 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날 저녁 계양면사무소에 군중 100여 명이 모였다. 이은선의 6촌 이담(李潭)은 군중을 향해 “주재소에 가서 이은선을 죽인 이유를 따지자”고 했다.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농민 100여 명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려 했다.

이들은 일본말 통역으로 데려가려고 면서기 이경응을 찾았으나 이경응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은 이미 자정이 넘었으나 단숨에 이경응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이경응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성난 군중은 이경응의 집을 박살냈다.

파일:심혁성2.png
1919년 11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심혁성은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훼방·직무집행방해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한 뒤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식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은신했다. 1958년 12월 14일 부천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심혁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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