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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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崇仁殿)은 이미 고려 숙종 때에 건립이 건의되었고 충숙왕 12년(1325년)에 지어졌다.[1] 이후 조선이 들어서면서 단군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에 따르면 세종 11년(1429년)에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崇仁殿) 옆에 처음 정전(正殿)과 동서 행랑(行廊)을 세웠던 것을 시초로 한다.
단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 자체는 이미 세종실록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자 기사에 실린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에 의해 건의된 것으로, 정척의 상소문에 따르면 조선 이전까지 단군은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에 곁가지로(...) 대충 배향되어 있는 처지였다. 그것도 기자의 신위가 높은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의 신위가 아래급인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도록 모셔져 있었고, 또 숭인전에는 제전(祭田)[2]이 있어서 한 달에 두 번(매달 초하루와 보름) 제사를 드리는데 단군은 그런 것도 없어서(...) 1년에 두 번(봄과 가을) 제사를 드리고 있다며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따로 만들도록 건의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기껏 단군만을 위해 사당을 따로 지어 놓고 거기에 왜 다시 동명성왕을 추가로 합사하게(...) 된 건지는 의문.
단종 즉위년(1452년)에 경창부윤 이선제가 올린 상소에서는 "지금 황해도에 창궐하는 있는 역병은 구월산에[3] 멀쩡하게 잘 모셔져 있던 단군의 신령을 함부로 평양으로 옮겨가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당시 황해도 아전 및 주민들의 발언이 소개되고 있다. 이선제도 평양에 있다가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지가 오래 전의 일인데 왜 이제 와서 굳이 평양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황해도의 단군 사당을 다시 복구할 것을 주장했다.[4] 세조 2년(1456년)에 다시 단군과 기자, 고구려 시조의 사당을 수리하고, 4년 뒤에 본인이 몸소 평안도를 순행하면서 친히 이곳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이때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고 현판을 화려하게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년)에 중건했고, 숙종은 직접 제사를 지낸 후 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영조 원년(1724년)에 숭령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순조 4년(1804년)에 평양부에 불이 나서 숭인전과 함께 불탄 적이 있다고. 국가 제사로써의 등급은 중사(中祀)로 봄과 가을마다 제사지냈는데, 순조 25년(1825년)에는 그 해가 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해라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승지를 보내서 숭령전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5]
고종은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자 "금년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무진년이라 하늘의 뜻이다"라며 제사를 지내고 이후 해마다 축문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반파되었다가 이후 평양객사 대동관 자리로 옮겨져 다시 지어졌다.
단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 자체는 이미 세종실록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자 기사에 실린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에 의해 건의된 것으로, 정척의 상소문에 따르면 조선 이전까지 단군은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에 곁가지로(...) 대충 배향되어 있는 처지였다. 그것도 기자의 신위가 높은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의 신위가 아래급인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도록 모셔져 있었고, 또 숭인전에는 제전(祭田)[2]이 있어서 한 달에 두 번(매달 초하루와 보름) 제사를 드리는데 단군은 그런 것도 없어서(...) 1년에 두 번(봄과 가을) 제사를 드리고 있다며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따로 만들도록 건의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기껏 단군만을 위해 사당을 따로 지어 놓고 거기에 왜 다시 동명성왕을 추가로 합사하게(...) 된 건지는 의문.
단종 즉위년(1452년)에 경창부윤 이선제가 올린 상소에서는 "지금 황해도에 창궐하는 있는 역병은 구월산에[3] 멀쩡하게 잘 모셔져 있던 단군의 신령을 함부로 평양으로 옮겨가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당시 황해도 아전 및 주민들의 발언이 소개되고 있다. 이선제도 평양에 있다가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지가 오래 전의 일인데 왜 이제 와서 굳이 평양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황해도의 단군 사당을 다시 복구할 것을 주장했다.[4] 세조 2년(1456년)에 다시 단군과 기자, 고구려 시조의 사당을 수리하고, 4년 뒤에 본인이 몸소 평안도를 순행하면서 친히 이곳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이때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고 현판을 화려하게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년)에 중건했고, 숙종은 직접 제사를 지낸 후 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영조 원년(1724년)에 숭령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순조 4년(1804년)에 평양부에 불이 나서 숭인전과 함께 불탄 적이 있다고. 국가 제사로써의 등급은 중사(中祀)로 봄과 가을마다 제사지냈는데, 순조 25년(1825년)에는 그 해가 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해라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승지를 보내서 숭령전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5]
고종은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자 "금년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무진년이라 하늘의 뜻이다"라며 제사를 지내고 이후 해마다 축문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반파되었다가 이후 평양객사 대동관 자리로 옮겨져 다시 지어졌다.
3. 기타 [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신으로 봉안하였으며, 숭령전에 모신 단군과 동명왕 중에서도 단군이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이 남아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서쪽에 단군, 동쪽에 동명성왕의 위판을 안치했다. 특이점은 우리나라에서 사당 건물은 보통 정면으로 보이는 칸수를 홀수로 맞춰서 짓는데 숭령전의 경우는 짝수로 지었다는 점이라고.[6]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이 남아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서쪽에 단군, 동쪽에 동명성왕의 위판을 안치했다. 특이점은 우리나라에서 사당 건물은 보통 정면으로 보이는 칸수를 홀수로 맞춰서 짓는데 숭령전의 경우는 짝수로 지었다는 점이라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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