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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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내용 [편집]
수성절목(守城節目), 수성윤음(守城綸音)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 영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한국의 수도방위책으로, 수도 한양의 방어 절차와 방어책을 명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들인 공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수도가 함락되곤 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숭례문을 포함해 조선 초기 한양도성 축성 과정에 투입된 인원은 최대 33만 명, 공사 중 사망자만 827명에 달할 정도로 성곽에 엄청난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수도를 너무도 쉽게 적에게 넘겨줘야 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2년 5월 2일에는 조선군이 화살 한번 쏴보지 못하고 일본군의 도성 입성을 허락해야 했고, 병자호란 때도 후금군 주력이 한양에 진입할 때 전투 한번 벌어지지 못했다.
이에 영조는 도성 방어 문제를 국가적 이슈로 삼고,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삼군의 도성 방어절차 및 방어진법을 규정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과 '도성삼군문분계지도', 그리고 유사시 한양 도성 방어 절차를 규정한 '수성절목', 영조의 수도 방위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명한 ‘수성윤음’의 네 가지 조령서를 제작하게 하였다. 수성책자는 이러한 수도 방어규정 및 절차 등을 총정리하여 만든 병서이다.
1700년대 당시 한국의 수도방위책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인정받는다.
조선 후기, 영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한국의 수도방위책으로, 수도 한양의 방어 절차와 방어책을 명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들인 공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수도가 함락되곤 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숭례문을 포함해 조선 초기 한양도성 축성 과정에 투입된 인원은 최대 33만 명, 공사 중 사망자만 827명에 달할 정도로 성곽에 엄청난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수도를 너무도 쉽게 적에게 넘겨줘야 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2년 5월 2일에는 조선군이 화살 한번 쏴보지 못하고 일본군의 도성 입성을 허락해야 했고, 병자호란 때도 후금군 주력이 한양에 진입할 때 전투 한번 벌어지지 못했다.
이에 영조는 도성 방어 문제를 국가적 이슈로 삼고,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삼군의 도성 방어절차 및 방어진법을 규정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과 '도성삼군문분계지도', 그리고 유사시 한양 도성 방어 절차를 규정한 '수성절목', 영조의 수도 방위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명한 ‘수성윤음’의 네 가지 조령서를 제작하게 하였다. 수성책자는 이러한 수도 방어규정 및 절차 등을 총정리하여 만든 병서이다.
1700년대 당시 한국의 수도방위책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인정받는다.
3. 바깥고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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