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우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송암우(宋岩于) |
이명 | 송재선(宋在善)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송암우는 1897년 2월 11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청리에서 농사를 짓던 중 1926년 1월 28일 김응선(金應先)의 권유를 받아들여 김운용(金云用)·정명옥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이튿날, 창의단 모험부원 계의산(桂義山)과 합류하여 여러 관공서를 순찰하였다. 30일 이들 5명은 광화문통 중국 요리점에서 주요 청사에 대한 폭탄 투척 계획을 논의하고, 31일 새벽을 기해 정명옥은 조선총독부 신청사, 김운용은 경성부청 신청사, 김응선은 조선은행, 계의산은 조선신궁, 송암우는 종로경찰서에 폭탄 1개씩을 투척하고, 포고문을 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폭탄 및 포고문을 그들이 묶던 청진동 진일여관(進一旅館)에 은닉,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기 전날에 경기도경찰부 가와사기(河崎) 경부(警部)의 밀정으로 있던 전좌한(全佐漢)의 밀고로 체포되었다.1927년 6월 21일 예심이 종결되어 송암우는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제3회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구형받았다. 8월 31일 최종 공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및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120일 통산)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8년 11월 1일 출옥하였다. 이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송암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폭탄 및 포고문을 그들이 묶던 청진동 진일여관(進一旅館)에 은닉,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기 전날에 경기도경찰부 가와사기(河崎) 경부(警部)의 밀정으로 있던 전좌한(全佐漢)의 밀고로 체포되었다.1927년 6월 21일 예심이 종결되어 송암우는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제3회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구형받았다. 8월 31일 최종 공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및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120일 통산)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8년 11월 1일 출옥하였다. 이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송암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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