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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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송대호는 1902년 3월 29일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옥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함평군의 유지인 조사현(曺士鉉)·정기연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고,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는 모순기, 강정태 등을 거사 계획에 끌여들었고,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 수백명의 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그는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함께 체포되었고,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8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송대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 수백명의 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그는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함께 체포되었고,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8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송대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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