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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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편집]
2. 활동사항 [편집]
손문욱(孫文彧)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잡혀 포로가 되어 왜국으로 끌려갔다. 이후 대마도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부하 장수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7년 4월 손문욱은 박계생을 통해 조선 조정에 비밀 편지를 보내고 귀순 의사를 밝혔다. 1597년 6월,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손문욱의 귀순을 허락하였고, 손문욱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가 되었다. 왜국의 정세와 왜군 사정을 잘 아는 터에 외교상, 군사상 전략 수립에 기여를 하였다. 이후 손문욱은 1598년 8월 절이도 해전, 10월 왜교성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왜교성 전투 당시, 조정의 명을 받아 명나라 제독 진린을 만나 순천 왜성의 연합 공격을 모의하였다.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배를 타고 참전하였다. 손문욱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곁을 지켰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을 발휘해 직접 갑판 위에 올라 지휘를 대신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손문욱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2등 공신이 되었고, 종3품 첨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4년 탐적사(耽謫使)로 임명되어 일본과 강화 회담을 하였고, 통교와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송환해왔다.
3. 기타 [편집]
- 손문욱은 출신이 불분명하고, 기록이 많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출신지, 출생일, 사망일 모두 미상이다.
- 손문욱이 조선에 귀순 의사를 밝혔을 때 선조가 그의 출신을 물었으나 조정에 아는 이가 없었다. 이후 그의 출신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 다만, ‘경주 손씨 세보 권1, 26쪽’#에 따르면에 따르면 손문욱은 손경원(孫敬源)의 8세손으로, 생전의 이름은 손요인(孫要寅)으로 나온다. 무과에 급제했으며, 행흥양 현감, 순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내고, 전쟁 중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손문욱이 귀순 이후 손(孫)씨를 썼다는 점과 당시 이름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욱(彧)’자 썼다는 점에서 그가 경주 손(孫)씨 출신이라는 가능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출신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 기록에는 손문욱은 여러 이름으로 나온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이문욱’, 일본 기록에는 ‘손문식’, ‘손문혹’으로도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손문욱은 귀순하기 전에는 이문욱(李文彧)으로 주로 기록되어 있고, 귀순 이후에는 손문욱(孫文彧)으로 주로 기록되어 있다.
- 손문욱이 귀순하였기 때문에 창성(創姓)하여 손(孫)씨를 썼다는 추측도 있다. 고대부터 영남 지역에 경주 손씨, 밀양 손씨, 일직 손씨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손(孫)씨를 썼다는 추측이다.
- 손문욱은 귀순 의사를 밝힌 비밀 편지를 조정에 보낼 때 박계생을 통해 전달했다. 박계생은 조정에 손문욱의 신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매우 사랑하여 곧바로 양아들이라 일컫고 국성(國姓)을 줌과 동시에 상으로 쌀 1천 석을 주었다.
그때 관두왜(館頭倭)가 마침 반역을 저질러 선봉이 되어 창을 가진 자 3백 명과 칼을 가진 자 2백여 명이 수길(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는 것을 문욱이 곧바로 몸을 날려 두 장수와 군인 1백여 명을 죽이자 적왜(賊倭)가 크게 무너졌다.
수길이 매우 기뻐하며 양마(良馬) 3필, 은안(銀鞍) 5지(枝), 쌀 1천 석, 금의(錦衣) 50건(件), 저단의(苧單衣) 50건, 환갑(環甲) 50병(柄), 창 15병, 장검(長劍) 3병, 조총(鳥銃) 7지(枝), 종 3백 60명, 군관 34명을 상으로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가 더욱 두터워지자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수길의 첩을 간통하였다고 무고하였는데, 수길이 「비방을 일으킨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겠으나 재주가 많고 공이 있어서 내가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 」 하고 드디어 행장의 부장을 삼아 공을 세우도록 하였으므로..."
- 손문욱은 항왜인가라는 점은 항왜의 의미에 따라 나뉜다. 항왜를 넓은 의미로 조선시대 투항한 일본인을 가르키면 손문욱은 조선인 포로였기 때문에 항왜로 분류되지 않으며, 좁은 의미로 조선시대 투항한 일본군을 뜻하면 조선인 포로 출신이라도 일본군 장수였기 때문에 항왜에 해당한다.
- 임진왜란 직후 손문욱의 공적에 이의를 제기한 이가 있었다. 형조 정랑 윤양(尹暘)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저 손문욱(孫文彧)은 일본에 붙잡혔던 하찮은 포로로 우연히 한 배에 탔다가 자기의 공으로 가로챘으므로 온 군사의 마음이 모두 분격해 한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여 전투의 승기를 가져온 것은 송희립(宋希立)인데 그 공을 손문욱이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문욱의 공적은 변함없이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손문욱은 임진왜란 말기인 1597년 6월에 귀순하여 이순신 장군 휘하 장수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1598년 12월까지 1년 6개 월 가량 짧은 기간 동안 지휘관으로 있었기에 그의 공적은 주변으로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
4. 픽션에서 다룬 손문욱 [편집]
- 손문욱이 이순신을 암살했다는 픽션이 있다. 이 역시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조총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손문욱은 지휘관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지휘관이 전투 지휘 도중 조총에 화약과 탄약을 집어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며, 조총을 겨누는 행동에서도 발각되어 제지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어떻게 몰래 저격하여 조총을 발사했다고 치더라도 발사 폭음과 섬광을 주변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순신 장군 주변에 다른 지휘관과 무사들이 있는데 조총으로 암살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 조총수가 쏜 탄환에 우연히 이순신 장군이 맞았다는 게 지배적인 설이다.
5. 창작물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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