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휘(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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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서휘는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그는 반일학생운동에 가담하였고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무렵 시안에서 머물며 중국 국민당의 장쉐량이 이끌던 부대에 참여하였다. 그 후 서안 사건에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가게 되었다. 1939년에는 항일군정대학 적공훈련반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여 연안과 태항산 등 팔로군 근거지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8월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지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광복이 된 후 1945년 말 입북하였다.[1]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연안파 동료들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 고급당학교에 유학하였다. 1950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3년 10월에는 조선직업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사상교육을 하고 현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제3차 세계노련대회 및 국제농민노동자직업동맹대회에 조선직업총동맹 대표단으로 참가하였다. 1955년 10월 국가검열부상을 맡았다.[2]
1956년 4월 노동당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해 8월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반김일성 운동이 대두되자 서휘도 연안파였던 그도 전면에 나서서 김일성 실각을 위해 나서기 시작하였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실각을 위한 공개덕 도전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서휘는 윤공흠 등의 연안파 인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서휘는 출당·철직당하였고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을 거부하고 중국에 정착하였다.[3]
1993년 시안시에서 머물던 그는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무렵 시안에서 머물며 중국 국민당의 장쉐량이 이끌던 부대에 참여하였다. 그 후 서안 사건에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가게 되었다. 1939년에는 항일군정대학 적공훈련반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여 연안과 태항산 등 팔로군 근거지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8월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지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광복이 된 후 1945년 말 입북하였다.[1]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연안파 동료들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 고급당학교에 유학하였다. 1950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3년 10월에는 조선직업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사상교육을 하고 현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제3차 세계노련대회 및 국제농민노동자직업동맹대회에 조선직업총동맹 대표단으로 참가하였다. 1955년 10월 국가검열부상을 맡았다.[2]
1956년 4월 노동당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해 8월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반김일성 운동이 대두되자 서휘도 연안파였던 그도 전면에 나서서 김일성 실각을 위해 나서기 시작하였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실각을 위한 공개덕 도전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서휘는 윤공흠 등의 연안파 인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서휘는 출당·철직당하였고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을 거부하고 중국에 정착하였다.[3]
1993년 시안시에서 머물던 그는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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