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태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泰 태 | ||
성씨 | 부여(扶餘) | |
휘 | 태(泰) | |
부왕 | 의자왕(義慈王) | |
재위 기간 | 음력 | 660년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해 수도 사비성 공격이 눈앞에 다가오자 부왕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좀 더 수비하기 좋은 북쪽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이 때 부여태는 사비성에 남아서 떠난 아버지 대신 멋대로 백제왕을 자칭하며 사비성을 군사로 굳게 지켰다.
그러나 형 부여융과 조카 부여문사(태자 부여효의 아들) 등은 서로 논의하기를, 의자왕이 잠시 사비성을 떠났을 뿐인데, 부여태가 이렇게 멋대로 왕 행세를 했다간 나중에 당군이 물러나기라도 한다면 우리도 부여태에게 동조한 것으로 몰려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측근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사비성을 탈출했다. 부여태는 탈출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막지 못했다.
결국 몇 차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가 있었고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에 뛰어올라와 깃발을 세우자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후에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귀족,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고 부여태 역시 함께 끌려가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형 부여융과 조카 부여문사(태자 부여효의 아들) 등은 서로 논의하기를, 의자왕이 잠시 사비성을 떠났을 뿐인데, 부여태가 이렇게 멋대로 왕 행세를 했다간 나중에 당군이 물러나기라도 한다면 우리도 부여태에게 동조한 것으로 몰려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측근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사비성을 탈출했다. 부여태는 탈출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막지 못했다.
결국 몇 차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가 있었고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에 뛰어올라와 깃발을 세우자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후에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귀족,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고 부여태 역시 함께 끌려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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