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조선 중종의 왕자
봉성군
鳳城君
봉성군(鳳城君)[1]
의민(懿愍)
전주(全州)
완(岏) / 항(𡵻)
자첨(子瞻)
부왕
생모
희빈 홍씨(熙嬪 洪氏)
부인
동래 정씨(東萊 鄭氏)
자녀
1남 1녀[2]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생몰기간
목차
1. 개요2. 사후3. 여담4. 가족과 후손

1. 개요 [편집]

조선의 왕족. 조선 11대 임금 중종서자로, 전주 이씨 봉성군파의 파시조이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소생이다. 이름이 비슷한 중종의 서자이자 경빈 박씨의 아들인 복성군과는 이복형제이다.

12대 임금 인종 재위 때 관료였던 윤원형과 이기에게 아부를 부렸다는 이유로 경기관찰사 김명윤의 무고에 따라 계림군과 함께 반역 미수 혐의로 울진군으로 유배되었다. 귀양 중 발병으로 강원도 평창군으로 유배지가 바뀌어져서 그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3대 임금 명종 재위 때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위리안치된 후 자처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3]

2. 사후 [편집]

봉성군이 죽은 직후, 명종은 그의 작위를 회복하고 장례물품을 내리며 예법대로 장례를 지내게 했다.[4] 이러한 명종의 조처에 삼사가 모두 반발하여 취소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명종은 모두 불허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1570년 14대 선조 재위 때 영의정 이준경의 요청에 따라 을사사화 때 투옥자들과 함께 신원되었다. 1732년(영조 8년) 음력 윤5월 18일 영조가 '의민(懿慜)'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여담 [편집]

  •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태봉산(胎封山)은 산 정상에 봉성군의 태실을 묻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본래 명종은 봉성군이 벽서사건을 직접 모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계속되는 상소에 못이겨 결국 봉성군의 자처를 명령하게 된다.
  • 홍문관에서 봉성군의 사사를 요청하는 상소에 이름을 올린 인물 중에는 당시 응교였던 이황도 있었다. 이는 이후 정인홍이 회퇴변척소에서 이황을 비판하는 논거로도 활용되었다.

4. 가족과 후손 [편집]

정랑을 지낸 동래 정씨 정유인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그러나 아들없이 죽었기 때문에 성종의 아들 경명군의 손자인 문성군 이건(文城君 李健)이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5] 그래서 현재 전주 이씨 봉성군파는 실제로는 경명군의 후손이다.
[1] 전라남도 구례군의 별호인 봉성(鳳城)에서 따왔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3] 자살하도록 명령한 것이니 사실상 처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명종실록의 해당 기사를 적은 사관도 실록에서 이 죽음을 "드러내놓고 죽이지는 않았어도 사실은 죽인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4] 명종 2년(1547) 10월 2일 기유 1번째기사[5] 봉성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는 5촌 당숙 - 당조카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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