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석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천석은 1889년 8월 5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창수리(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신기동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권재형 등이 주도한 창수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다 오후 4시경 400명의 군중과 함게 창수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했다.
이후 기물과 서류를 파괴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타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의 비품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빼앗아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히 파기하고 오후 7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덕군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9년 11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천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기물과 서류를 파괴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타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의 비품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빼앗아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히 파기하고 오후 7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덕군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9년 11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천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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