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화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박중화(朴重華)
생몰
경상도 경주도호부
(현 경상북도 경주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중화는 1878년 2월 3일 경상도 경주도호부(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18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0년에는 시즈오카현립중학교, 1903년에는 시즈오카농학교에 입학하여 각각 수학하였다. 이때 카도타(門田) 타케치라는 일본인 여성과 동거하며 슬하에 박옥자(朴玉子)·박겸자(朴兼子) 등 두 딸을 두었다.

귀국 후에는 경성부 청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에 거주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그는 이에 가입하여 주로 한성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 신민회의 합법적 청년단체로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될 때 그는 발기위원으로서 참여하였으며, 이후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회장을 거쳐 청년학우회 제2대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이즈음 보성중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도 진력하였다.

한편, 같은 해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함께 조직하여 당원으로서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09년부터 1916년까지는 휘문의숙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발매 및 반포가 금지되었던 대한역사(大韓歷史) 교과서를 가르치는 등 조선인으로서 한일합병의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항상 독립사상 및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는 이즈음 경성부 수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에 거주하였다.[3]

그러다가 1917년 감익룡과 함께 자산가의 청년 자제들을 유인, 김규묵(金奎默)이 조제한 자양강장제를 본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아 그 이윤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을 계획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취재 혐의로 징역 10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그해 10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언도받아 출옥하였다.#

그후 1920년 김명식(金明植)·박이규(朴珥圭)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소명하기 어렵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왜정시대인물사료에 1912년 당시 35세였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1917년 판결문에 40세로 기재되어 있다.[2] 판결문[3] 그가 살았던 수하동 18번지는 현재 수하동 67번지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에는 미래에셋금융그룹 본사가 위치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이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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