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헌(독립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박재헌(朴在憲)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재헌은 1900년 1월 25일 경상북도 대구군 화현내면 명곡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 및 대구성경학교 학생들과 함께 2차례에 걸쳐 대구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다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0년 평양숭실학교에 전학하여 재학하던 그는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자 선교사를 통해 독립을 호소했다.
1922년에는 달성군 중심으로 독립공채모집 및 자유지(自由誌)를 간행하여 외국인 선교사에게 배부하는 등 독립운동에 부친 박기형(朴琪瀅)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3년 1월 24일에 부친과 연루자가 다수 붙잡혔으나 그는 밀양 등지로 피신하였다. 1925년 밀양 집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의열단 단원 고인덕과 함께 폭탄 거사를 준비했으나 계획이 탄로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옥에 성공했다.
1926년, 그는 대구의 미국 선교회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1937년에도 그는 중국의 대한독립군 상황을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등 독립운동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 1941년 12월 다시 일제에 체포되어 재차 투옥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6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재헌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었다.
1922년에는 달성군 중심으로 독립공채모집 및 자유지(自由誌)를 간행하여 외국인 선교사에게 배부하는 등 독립운동에 부친 박기형(朴琪瀅)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3년 1월 24일에 부친과 연루자가 다수 붙잡혔으나 그는 밀양 등지로 피신하였다. 1925년 밀양 집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의열단 단원 고인덕과 함께 폭탄 거사를 준비했으나 계획이 탄로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옥에 성공했다.
1926년, 그는 대구의 미국 선교회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1937년에도 그는 중국의 대한독립군 상황을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등 독립운동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 1941년 12월 다시 일제에 체포되어 재차 투옥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6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재헌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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