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곤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목차
1.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곤2. 이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곤

1.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곤 [편집]

성명
박재곤(朴載坤)
이명
마위서(馬韋犀)
본관
생몰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 노남동[1]
사망지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재곤은 1916년 10월 21일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 노남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했고, 1944년 7월 한국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뒤 12월에 화중지구 공작대원으로 활약했다. 1945년 6월 지돼본부 정훈실에 근무했으며, 8월에 국내정진공작대 정보반에 편입되어 국내 침투를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을 예편하고 국방부 총무과장, 한국반공연맹 홍보부장을 역임하였고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97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2010년 사천비행장 근무 당시 군인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직접 촬영한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재곤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이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곤 [편집]

성명
박재곤(朴在坤)
생몰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재곤은 1878년 5월 13일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낙양면 지석리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을 보고 자신의 고향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이원모(李元模)와 협의하여 이천면 탑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 2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19년 4월 6일 오후 4시 경 탑리 시장에서 1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고, 1919년 5월 28일 경성복심법원과 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상소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재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노북동·도봉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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