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성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박유성(朴裕成) |
이명 | 박진상(朴珍相) |
본관 |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대통령표창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유성은 1907년 6월 30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선암동(현 덕진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3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서 김판권(金判權)·최판옥(崔判玉) 등이 주도한 소작쟁의에 참여해 지주들의 소작권 이전 횡포에 항거하여 그 방지 방법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이어 6월에는 박유성을 비롯한 청년회원 수십 명이 모여 덕진면 운암리와 백계리(栢溪里) 방면에서 구(舊)소작인의 집에 돌입하여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꾸짖고 동인들을 구타 응징한 후 소작쟁의 만세를 고창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8월을 받고 공소하여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및 벌금 20원을 받기까지 미결기간 동안 1년 9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광군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58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박유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8월을 받고 공소하여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및 벌금 20원을 받기까지 미결기간 동안 1년 9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광군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58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박유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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