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각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박용각(朴容珏) |
이명 | 박용규(朴容珪)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용각은 1898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용만의 친척으로, 1919년 3월 철원에서 3.1 운동이 벌어지자 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의원으로 참여했으며, 1921년에는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 청원에 반대하는 성토문(聲討文)을 발표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내부 분열로 쇠약해지자 의정원 직을 사임한 뒤 1925년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의 후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박용각은 의열단의 방침에 따라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입교하여 조선인 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활동하였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1940년경 김원봉과 함께 충칭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가담했고, 8.15 광복 후 귀국해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6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박용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내부 분열로 쇠약해지자 의정원 직을 사임한 뒤 1925년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의 후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박용각은 의열단의 방침에 따라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입교하여 조선인 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활동하였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1940년경 김원봉과 함께 충칭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가담했고, 8.15 광복 후 귀국해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6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박용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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