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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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박영모는 1887년 4월 11일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양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정치에 관한 비밀결사인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강유원(講遊園)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윤상태(尹相泰)·서상일·이시영 등과 함께 1913년 음력 정월 15일 달성군 안일암에서 국권회복에 관한 모의를 하고, 1915년 경북 달성에서 대구에 본부를 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중앙총부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고 1917~1918년에 중국 관내와 만주 등지를 왕복하며 그 지방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였다. 또한 러시아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연계를 모색하는 한편 동지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9일부터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약 1년여 동안 취조를 받았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로부터 불기소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출옥 후, 박영모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제1회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박영모는 이때 의사(議事)로 참여하여 헌장 초안 등을 의결하고, 월간 기관 잡지 <아성(我聲)>의 발간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8년 10월 8일 경성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영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때 그는 중앙총부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고 1917~1918년에 중국 관내와 만주 등지를 왕복하며 그 지방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였다. 또한 러시아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연계를 모색하는 한편 동지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9일부터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약 1년여 동안 취조를 받았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로부터 불기소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출옥 후, 박영모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제1회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박영모는 이때 의사(議事)로 참여하여 헌장 초안 등을 의결하고, 월간 기관 잡지 <아성(我聲)>의 발간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8년 10월 8일 경성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영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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