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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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편집]
2. 상세 [편집]
2.1. 한국 [편집]
서울 문묘 대성전 |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성행하였으며, 과거제와 서원과 더불어 유교 사회의 단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요소였다. 조선조 말기에는 그 규모가 커져 공자 이하 133명을 모시게 되었다. 조선의 문묘는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을 비롯해 정몽주 등 15인과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향까지 동국 18현이 배향되어 있다.
문묘에 배향되면 선정(先正)으로 인정받아 인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그 배향 논의는 매우 신중하고 격론을 거쳐 오랜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는데, 광해군 때 조선오현(朝鮮五賢)[2]이 우여곡절 끝에 배향된 이후, 특정 붕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 이후 배향된 인물들은 배향과 출향을 반복[3]하며 논란이 지속되었다. 즉, 한국의 문묘는 조선판 명예의 전당이라 볼 수 있다.
서울의 성균관 및 지방의 향교에 두었는데,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은 보물 제141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의 대성전 중에도 보물 또는 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들이 다수 있다.
문묘에 배향되면 선정(先正)으로 인정받아 인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그 배향 논의는 매우 신중하고 격론을 거쳐 오랜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는데, 광해군 때 조선오현(朝鮮五賢)[2]이 우여곡절 끝에 배향된 이후, 특정 붕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 이후 배향된 인물들은 배향과 출향을 반복[3]하며 논란이 지속되었다. 즉, 한국의 문묘는 조선판 명예의 전당이라 볼 수 있다.
서울의 성균관 및 지방의 향교에 두었는데,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은 보물 제141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의 대성전 중에도 보물 또는 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들이 다수 있다.
2.2. 중국 [편집]
문묘를 중국어로 읽어 원먀오(wén miào)라고 부르는데, 중국 전역에 수많은 문묘들이 존재한다.
2.2.1. 공묘 [편집]
2.2.2. 남종 공묘 [편집]
저장성 취저우(衢州 구주) 시에 있다. 일반 문묘와의 차이점이라면, 공자의 다른 직계 후손인 남종 가문이 직접 제례를 지내는 곳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송나라가 강남으로 쫒겨나게 된 정강의 변과 연관이 있다. 정강의 변으로 인해 당시 공자 가문의 종손인 연성공 공단우(48대손)는 남송 조정을 따라 구주로 피난을 가서 새로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가 남았는데, 곡부를 점령한 금나라에서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해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적통 가문이 2개가 되었다. 곡부에 남은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北宗), 구주로 피난간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南宗)으로 부르게 되었다.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이 당시 남종의 종손인 공수에게 곡부에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자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보하며 정통성을 정리한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이후 남종은 연성공 자리를 잃고 일반 민간 가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때 공자의 종가였다는 점을 인정받아서 명청 때까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으며, 공자에 대한 사가제사를 허락받아서 제례를 쭉 이어가고 있다.
이는 송나라가 강남으로 쫒겨나게 된 정강의 변과 연관이 있다. 정강의 변으로 인해 당시 공자 가문의 종손인 연성공 공단우(48대손)는 남송 조정을 따라 구주로 피난을 가서 새로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가 남았는데, 곡부를 점령한 금나라에서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해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적통 가문이 2개가 되었다. 곡부에 남은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北宗), 구주로 피난간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南宗)으로 부르게 되었다.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이 당시 남종의 종손인 공수에게 곡부에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자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보하며 정통성을 정리한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이후 남종은 연성공 자리를 잃고 일반 민간 가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때 공자의 종가였다는 점을 인정받아서 명청 때까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으며, 공자에 대한 사가제사를 허락받아서 제례를 쭉 이어가고 있다.
2.3. 대만 [편집]
대만 타이베이 따통구(大同區) 따롱가(大龍街) 275호에 위치해 있다. 보통 타이베이 공자묘(臺北市孔廟)로 불린다. 본래 타이베이 공묘는 1879년 광서제 때 건설을 시작해서 3년 후인 1882년 완성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점령한 일본이 공묘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병원과 여학교를 세웠다. 이후 1929년 대성전을 복원하고 석전대제를 부활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본 총독부가 다시 제사를 금지해서 명맥이 끊겼다. 종전 후인 1946년 다시 석전대제가 부활하였고 이후 개보수를 거쳐서 1971년부터는 타이베이 시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중국의 다른 공묘와 달리 이곳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현대에도 공자의 종손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직접 제례를 올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래 공자의 종손들은 위에 언급한 취푸의 문묘에서 거주하며 제례를 지냈으나, 국부천대로 당시 종손인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이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쿵더청은 이 타이베이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올리게 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취푸의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지내지 않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겨우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공자의 종손이 석전대제를 치루는 곳은 이 타이베이 공묘가 되었다.
중국의 다른 공묘와 달리 이곳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현대에도 공자의 종손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직접 제례를 올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래 공자의 종손들은 위에 언급한 취푸의 문묘에서 거주하며 제례를 지냈으나, 국부천대로 당시 종손인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이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쿵더청은 이 타이베이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올리게 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취푸의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지내지 않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겨우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공자의 종손이 석전대제를 치루는 곳은 이 타이베이 공묘가 되었다.
2.4. 베트남 [편집]
수도 하노이에 1070년에 세운 문묘가 있다. 1076년에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서 유학자를 양성한 곳이다. 베트남식 한자음으로는 반 미에우(Văn Miếu)라고 한다.
1484년 진사(회시 합격자)들의 명단을 새긴 비를 세운 이래 1787년까지 진사 합격자 1,306명(1442-1787년 간의 진사)의 명단을 새긴 진사제명비 82기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중국 곡부의 문묘를 본따 세운 곳이다.
1484년 진사(회시 합격자)들의 명단을 새긴 비를 세운 이래 1787년까지 진사 합격자 1,306명(1442-1787년 간의 진사)의 명단을 새긴 진사제명비 82기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중국 곡부의 문묘를 본따 세운 곳이다.
3.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 [편집]
4. 관련 문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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