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펠리에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Montpellier}}} 몽펠리에 | |
국가 | |
레지옹 | |
데파르트망 | 에로(34)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준수) |
한국과의 시차 | -7시간 |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프랑스 남부의 주요 도시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식민 도시로 개척되면서 시작된 경우가 대부분인데,[1] 특이하게도 몽펠리에는 중세 도시로 출발한다. 몽펠리에 인근의 마글론이라는 도시가 10세기 무렵 지중해 일대 해적들의 창궐로 인하여 초토화되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가 마글론을 포기하고 방어가 보다 유리한 내륙지방에 도시를 하나 건설하는데, 이것이 몽펠리에 역사의 출발이다. 이후 12세기 무렵이 되면 지중해 무역을 통하여 크게 번성하며, 가톨릭교회에 의해 법대와 의대가 설립되면서 교육의 중심지로도 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가 몽펠리에의 최선정기로 당시 프랑스 내에서 수도 파리 정도를 제외하면 몽펠리에보다 대규모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2]
13세기에는 영주 간의 정략결혼을 통해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잠시 편입되기도 하지만 아라곤 왕국은 몽펠리에의 자치권을 상당부분 인정해줬고, 1348년 필리프 6세가 몽펠리에를 매입하면서 다시 프랑스의 영토가 된다. 15세기 무렵까지도 몽펠리에는 여전히 프랑스 남부 최대의 경제 도시였으나, 이 무렵 전유럽을 덮친 흑사병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고는 새로이 급부상한 마르세유에게 결국 위상을 내주고 만다. 한편 16세기 종교개혁부터 17세기의 위그노 전쟁 시기까지 약 한 세기 동안 몽펠리에는 위그노들의 본거지였다.[3]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몽펠리에 역시 공업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옆동네 마르세유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 무렵부터 몽펠리에는 포도주 생산지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이 포도주가 상당히 인기를 끌면서 주민들이 공업보다는 포도 경작에 몰두하면서 산업화 속도가 저해된 것도 있다. 또한 몽펠리에는 앙시앵 레짐 체제 당시 마지막까지도 귀족들이 봉건적 특권을 향유하던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산업 혁명을 뒷받침할 정치적 개혁이나 부르주아 계층의 숫자가 미비하기도 했다. 결국 몽펠리에는 그저 그런 지방 도시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래도 에로 주 안에서는 여전히 최대 도시기이는 했다.[4]
몽펠리에가 재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알제리 전쟁 이후 알제리가 독립하자 소위 피에 누아르라고 불렸던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재정착한 곳 중 하나가 바로 몽펠리에였기 때문.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몽펠리에는 연평균 5% 정도의 인구 성장을 보여주었는데, 피에 누아르들의 재정착이 인구 증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3세기에는 영주 간의 정략결혼을 통해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잠시 편입되기도 하지만 아라곤 왕국은 몽펠리에의 자치권을 상당부분 인정해줬고, 1348년 필리프 6세가 몽펠리에를 매입하면서 다시 프랑스의 영토가 된다. 15세기 무렵까지도 몽펠리에는 여전히 프랑스 남부 최대의 경제 도시였으나, 이 무렵 전유럽을 덮친 흑사병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고는 새로이 급부상한 마르세유에게 결국 위상을 내주고 만다. 한편 16세기 종교개혁부터 17세기의 위그노 전쟁 시기까지 약 한 세기 동안 몽펠리에는 위그노들의 본거지였다.[3]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몽펠리에 역시 공업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옆동네 마르세유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 무렵부터 몽펠리에는 포도주 생산지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이 포도주가 상당히 인기를 끌면서 주민들이 공업보다는 포도 경작에 몰두하면서 산업화 속도가 저해된 것도 있다. 또한 몽펠리에는 앙시앵 레짐 체제 당시 마지막까지도 귀족들이 봉건적 특권을 향유하던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산업 혁명을 뒷받침할 정치적 개혁이나 부르주아 계층의 숫자가 미비하기도 했다. 결국 몽펠리에는 그저 그런 지방 도시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래도 에로 주 안에서는 여전히 최대 도시기이는 했다.[4]
몽펠리에가 재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알제리 전쟁 이후 알제리가 독립하자 소위 피에 누아르라고 불렸던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재정착한 곳 중 하나가 바로 몽펠리에였기 때문.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몽펠리에는 연평균 5% 정도의 인구 성장을 보여주었는데, 피에 누아르들의 재정착이 인구 증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3. 교통 [편집]
몽펠리에 메디테라네 공항의 소재지이다.
4. 여담 [편집]
[1]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마르세유.[2] 다만 중세에는 장원을 기반으로 비의도적인 지방 분권이 훌륭하게 이루어진 사회여서,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정말 자그마한 규모이다. 인구가 대략 4만명 정도(...).군청소재지 생각하면 된다[3] 일찍이 중세 시기 몽펠리에에서 무역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도 종교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몽펠리에 특유의 지역 분위기 탓이 컸다. 종교적 극단의 시대였던 십자군 전쟁 무렵에도 무슬림들과 유대교도들이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몽펠리에.[4] 1911년 당시 통계를 보면 몽펠리에의 인구는 10만이 채 안된다. 옆동네이자 한때 라이벌이었던 마르세유는 이 당시에 이미 60만 가까이에 육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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