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견사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한다. 전설로는 당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이다. 이 터가 대국(大國)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초대 주지로 부임해 22년 동안 지냈으며 이 곳에서 삼국유사를 구상했다고 한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떠나 자연스럽게 폐사되었다는[1]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지만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기에 임진왜란 때 일어난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인조 때 재건되었으며 1900년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했으며 관리를 안 하는 사이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09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됐는데 당시 대견사의 대웅전이 일본 쪽으로 향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없앴다고 한다.
그렇게 100년 가까이 삼층석탑만 남은 채로 방치되는가 싶었지만...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초대 주지로 부임해 22년 동안 지냈으며 이 곳에서 삼국유사를 구상했다고 한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떠나 자연스럽게 폐사되었다는[1]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지만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기에 임진왜란 때 일어난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인조 때 재건되었으며 1900년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했으며 관리를 안 하는 사이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09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됐는데 당시 대견사의 대웅전이 일본 쪽으로 향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없앴다고 한다.
그렇게 100년 가까이 삼층석탑만 남은 채로 방치되는가 싶었지만...
2.1. 복원 [편집]
3. 교통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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