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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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씨)/목록. 전 탁구선수는 김택수(탁구)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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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직후 찍은 사진이다. 왼쪽은 1915년생, 당시 만 66세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고 오른쪽은 1926년생, 당시 만 55세인 김택수 회장이다. 정주영 회장도 약간 동안이긴 하지만 사진에서는 김택수 회장이 열살은 더 늙어보인다.

金澤壽
1926년 09월 10일 - 1983년 07월 17일

목차
1. 개요2. 기타3. 선거이력

1. 개요 [편집]

대한민국의 전 체육행정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김씨.

1926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한일합섬 창업주 수당 김한수의 친동생이다. 경남고등학교(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김종필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선 개헌 추진 초반에 반대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결국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영병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1978년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 12월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한국인으로는 이기붕(1955~1960), 이상백(1964~1966), 장기영(1967~1977)에 이어 네번째였는데, 마침 1977년 4월에 장기영씨가 현직 IOC 위원으로 세상을 떠난 관계로 한국으로서는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도 6년만에 세상을 떴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중선거구제였는데 선거 유세에서 자신을 주연배우에, 나머지 후보를 조연배우에 비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하지만 IOC 위원으로 계속 활동하였으며,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볼 수 있었다. 1983년 폐암으로 별세하였다.[1]

공화당 원내총무 시절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를 고교 2년 후배인 김영삼이 맡았다.[2]

2. 기타 [편집]

  • 40대부터 백발이라 6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실제론 환갑까지도 살지 못했다. 여러모로 안습.
  •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 건물을 지어서 기증하였다. 도서관 건물의 명칭이 국산법학도서관인데, 국산이 바로 김택수의 아호.

3. 선거이력 [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
당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
당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양산군)
-
당선
[1] 그가 죽은 후 IOC 위원은 1984년 '피스톨 박' 박종규가 선임되었으나 다음해 바로 별세하였고, 1986년에는 김운용이 선출되어 2005년까지 장장 20년을 재임하였다.[2] 이는 김무성(24회, 여당) - 문재인(25회, 야당)이 후에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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