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걸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에 참여하고 의용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편집]
김이걸은 1884년 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에서 외삼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교육자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던 그는 고향인 용연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당시 일진회를 비롯한 매국노들의 망국행위에 크게 분노하였고 1908년 3월경부터 배일운동을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김이걸은 이재명(독립운동가), 이동수, 김정익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친일파 이완용 등을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결의를 맺었다. 그는 당시 김병현, 이학필 등으로부터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권총을 빌려줄 것을 의뢰받았고 칼과 권총 2정을 구입하여 빌려주는 등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해 11월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는 거사를 치루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김이걸도 일본제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공소원형사부에 회부되었고 1910년 7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1]
출옥을 한 후에도 김이걸은 계속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천도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였다. 같은 해 그는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활덩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2] 해방 후 그는 대전에서 거주하다 1950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50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3]
1909년 10월 김이걸은 이재명(독립운동가), 이동수, 김정익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친일파 이완용 등을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결의를 맺었다. 그는 당시 김병현, 이학필 등으로부터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권총을 빌려줄 것을 의뢰받았고 칼과 권총 2정을 구입하여 빌려주는 등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해 11월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는 거사를 치루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김이걸도 일본제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공소원형사부에 회부되었고 1910년 7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1]
출옥을 한 후에도 김이걸은 계속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천도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였다. 같은 해 그는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활덩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2] 해방 후 그는 대전에서 거주하다 1950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50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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