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운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소개 [편집]
2. 생애 [편집]
1919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시대신조에 시 <신조>를 발표했고, 29년, 매일신보 학예부원이 된 뒤, 아동 교육과 한국 문학 번역에 힘썼다.
1950년대부터는 일본 생활을 바탕으로 여러 수필들을 저술했고, 대표작으로는 피딴 문답, 마이동풍첩, 물 한 그릇의 행복등 이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 등 3편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외되었다.
사실 친일활동은 80년대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거주하는 번역가 도다 이쿠코는 한국 유학 당시 "김소운 글을 좋아한다"고 하다가 동창생에게 그 색히는 친일파 매국노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다.
1950년대부터는 일본 생활을 바탕으로 여러 수필들을 저술했고, 대표작으로는 피딴 문답, 마이동풍첩, 물 한 그릇의 행복등 이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 등 3편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외되었다.
사실 친일활동은 80년대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거주하는 번역가 도다 이쿠코는 한국 유학 당시 "김소운 글을 좋아한다"고 하다가 동창생에게 그 색히는 친일파 매국노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다.
3. 여담 [편집]
그가 쓴 《목근통신》에는 하가쿠레에 실려있는 설화라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떡집 이웃에 무사와 어린 아들이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가게에서 놀고 간 뒤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 떡집 주인이 아이를 의심하자 무사가 말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아들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떡집 주인이 계속 의심하자 무사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칼로 떡집 주인을 베어 죽인 뒤 자신도 할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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