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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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군의 심문 중에서.
2. 일생 [편집]
아버지 김윤방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하였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에 언니들과 다니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평등과 신학문을 배워나갔다. 졸업 이후 1905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하고 근무하던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김필순의 도움으로 숙부의 집에서 1906년 연동여학교[3]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간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4]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이 당시 김마리아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띠)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허나 독립운동 대신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에 식상한 그녀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파일:김마리아 1.jpg
1923년 파크 대학교 졸업식에서의 김마리아.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5]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제국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1년 2개월 후 있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결국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생전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철수와 가깝게 지내서 주위에서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김마리아와 김철수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김철수에겐 이미 고향에 본처가[6] 있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사실 결혼을 못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도 있었다. 김마리아는 성고문을 당하며 한쪽 가슴이 없고 국부는 인두로 지져지는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녀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심문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회, 감리회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사후 그의 업적을 기려 서울 보라매공원에는 그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4]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이 당시 김마리아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띠)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허나 독립운동 대신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에 식상한 그녀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파일:김마리아 1.jpg
1923년 파크 대학교 졸업식에서의 김마리아.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5]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제국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1년 2개월 후 있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결국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생전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철수와 가깝게 지내서 주위에서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김마리아와 김철수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김철수에겐 이미 고향에 본처가[6] 있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사실 결혼을 못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도 있었다. 김마리아는 성고문을 당하며 한쪽 가슴이 없고 국부는 인두로 지져지는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녀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심문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회, 감리회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사후 그의 업적을 기려 서울 보라매공원에는 그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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