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1868)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경상도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리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사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김덕수는 1868년 2월 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리(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이 주도한 영해읍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날 오후 1시경, 그는 남효직, 남계병, 정규하 등과 함께 3천여 명의 군중 선두에 서서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 등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앞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고 영덕 경찰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황급히 출동하여 시위를 제지하려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는데, 그때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그들을 추격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세례를 가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만세시위는 이날밤과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는데, 오전 11시경에 이르러서 포항(浦項) 일본헌병대에서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시위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들도 이 엄청난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날 오후 5시경, 대구(大邱)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 장교 이하 17명이 도착하여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 때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강원도 강릉군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37년 4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덕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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