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봉(1898)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본관 | |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김덕봉은 1898년 12월 12일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이동리(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9월 각지의 부자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부했다. 또한 한면에는 '태극기(太極旗)와 독립기념'이라 새기고 한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라 새긴 50전짜리 은메달을 제시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김두현(金斗鉉)·김두옥(金斗玉)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중앙학림(中央學林) 박치오(朴致悟) 승려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받아 강우석(姜佑石)·박만선(朴萬善)에게 건네주며 활동 하다가 동지 13명과 함께 1921년 5월 12일경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62년 1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덕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던 중 중앙학림(中央學林) 박치오(朴致悟) 승려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받아 강우석(姜佑石)·박만선(朴萬善)에게 건네주며 활동 하다가 동지 13명과 함께 1921년 5월 12일경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62년 1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덕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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