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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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890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1911년 3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형사가 된 때는 1929년인데 그 때부터 16년 동안 평안북도 경찰부의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하면서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독립 운동을 탄압하여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기소되었고, 최초의 사형 선고를 받은 바 있다.
김덕기가 체포하고 송치한 사상범 숫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고 청산리 대첩 때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오동진 장군, 의성단 단장을 역임했던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장창헌과 김형출은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사살해 버렸으며,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대형 의거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서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 받았다. 1934년 4월에는 쇼와6~9년 사면 조군기장(漎軍記章)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관료로 중용되어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43년에는 농상부장에 임명, 1944년 9월 조선철도간선 긴급증강 부산지방연락부 간사를 냈다.
하지만 김덕기의 이런 잘 나가던 출세가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기점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가 경찰로 재직하던 북한 땅에는 소련 군정이 들어섰고 소련 군정은 간접 통치를 택하면서 북한 지역 내 친일파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밑돌을 깔아주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이 악인을 당연히 살려둘 리는 없었고, 그를 때려잡으려 혈안이었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덕기는 곧바로 남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지면서 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김덕기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간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지면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감형되었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곧바로 석방되었고, 전쟁 중 사망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유력한 설로는 석방 직후 정릉 근방의 산에 올라갔다가 추락사했다는 설이 있다. 혹은 조선인민군에게 끌려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김덕기가 체포하고 송치한 사상범 숫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고 청산리 대첩 때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오동진 장군, 의성단 단장을 역임했던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장창헌과 김형출은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사살해 버렸으며,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대형 의거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서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 받았다. 1934년 4월에는 쇼와6~9년 사면 조군기장(漎軍記章)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관료로 중용되어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43년에는 농상부장에 임명, 1944년 9월 조선철도간선 긴급증강 부산지방연락부 간사를 냈다.
하지만 김덕기의 이런 잘 나가던 출세가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기점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가 경찰로 재직하던 북한 땅에는 소련 군정이 들어섰고 소련 군정은 간접 통치를 택하면서 북한 지역 내 친일파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밑돌을 깔아주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이 악인을 당연히 살려둘 리는 없었고, 그를 때려잡으려 혈안이었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덕기는 곧바로 남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지면서 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김덕기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간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지면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감형되었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곧바로 석방되었고, 전쟁 중 사망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유력한 설로는 석방 직후 정릉 근방의 산에 올라갔다가 추락사했다는 설이 있다. 혹은 조선인민군에게 끌려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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